마지막 밤
19세기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스톤허스트 수용소에서는 가구를 불태우는 캠프파이어가 개최됩니다. 명목상 캠프파이어지만 난방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까지 열악해졌기에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원래 직원들은 모두 감금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니 경제활동이 되지 않았던 겁니다.
일라이저는 밀리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위험하다고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캠프파이어를 즐기는 동안 밀리는 방에서 나와서 혼자서 거실에서 춤을 춥니다. 그리고 무척 즐거워하죠. 그런데 미키 핀이 음흉하게 그녀를 바라봅니다. 같이 춤을 추면서 강압적으로 그녀에게 키스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이상합니다. 밀리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요구합니다. 그 모습에 미키 핀은 밀리의 목을 졸라 살해해 버립니다. 대체 이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성적 만족이 목적이라면 미키 핀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목을 졸라 살해를 한 것일까요? 미키 핀이 밀리를 살해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시다. 여성의 유혹에 두려움을 지니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유혹당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신에서 강한 흥분이 발생하고 그것은 마치 ‘공포’에 질린듯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흔히 말하는 이성공포증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우리가 성적 행동을 한다고 해도 정신적 만족감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불쾌감이 동반됩니다. 그럼 미키핀이 밀리를 강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봅시다. 그것이 미키 핀에게 만족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밀 리가 그 상황을 반가워한다면 어떨까요? 반대로 유혹당하는 상황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시를 든다면 가학증자는 피학증자를 찾아서 가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피학증자는 가학증자에게 가학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둘이 만나면 환상적인 커플이 될 거라고 다들 상상을 합니다만 그게 진짜 상상에 불과한 내용입니다.
미키 핀은 수용소에서 사일러스의 조수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환자들과 다르게 노동력이 손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수용소 관리의 전권을 미키 핀에게 맡기진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사일러스는 격리해야 할 정신질환자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타인의 파괴를 통해서 쾌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을 격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키 핀이 그런 사람으로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키 핀이 타인의 파괴를 통해서 쾌감을 얻어야 하는데, 타인을 파괴하지 못하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게 된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행동 시나리오가 뒤틀리면서 사리분별을 못하는 상황까지 갑니다. 따라서 그는 밀리를 통해서 어느 정도 만족을 얻고 싶었지만 그 실패로 인해서 우발적 살해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밀리의 죽음이 수용소에 알려지고 모두들 슬퍼합니다. 그런데 교살이 분명한 밀리의 죽음을 사일러스는 엉뚱한 진단명으로 살해되었다는 것을 지우려고 합니다. 아마도 사일러스의 생각대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사일러스는 자신의 조수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했을 겁니다. 사일러스가 생각하던 최악의 정신질환자가 자신의 조수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치료적 관점이 명확했던 사일러스의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일 겁니다.
에드워드는 수용소의 실체를 알고 이 것을 끝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미키 핀에게 저지당하고 사일러스는 그를 전기치료 대상자로 만듭니다. 그런데 이번 전기치료는 수용소 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실시됩니다. 마치 ‘공개처형’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기치료를 실시하려는 찰나, 에드워드는 사진을 하나 보여줍니다. 그 사진을 확인한 사일러스는 최면에 빠진 듯 멍해지고 그에게 전쟁터의 환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환영을 따라 어디론가로 가버리죠. 그때 일라이저는 에드워드를 구하려고 합니다만 미키핀이 일라이저를 뒤에서 끌어안습니다. 곧바로 발작이 일어나서 행동이 멈춰버립니다. 에드워드는 일라이저에게 자신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히스테리가 완화되면서 동시에 미키핀을 제압하고 에드워드를 구하죠.
여기서는 조금 의문입니다. 그 상황에서 과연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히스테리 발작이 과연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거죠. 일단은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났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히스테리 발작이 완화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증상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접근해서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일라이저의 히스테리 증상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첫 번제는 불쾌한 남편에게서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이 있고 그다음은 증상을 통해 즐기는 것을 금지하는 겁니다. 그건 반대로 사랑에 의한 즐거움을 포기하고 살아왔다는 거죠. 1800년대 요구되는 정절의 개념은 요즘의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녀가 지닌 도덕적인 관념은 다른 남자에게 끌리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 연애감정은 그 도덕관념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따라서 그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증상을 이끌어내야 하고 그것은 처벌로도 작동을 합니다.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에서 유명한 엘리자베스 사례를 아시는 분은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일라이저의 갈등과 조금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형부를 사랑했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그 사람과 결혼을 한 거죠. 그리고 언니가 병으로 죽습니다. 연적이었던 언니가 사라지자 엘리자베스는 다시 형부를 향한 사랑에 불이 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죽은 언니에게 미안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히스테리가 발병했습니다. 아마도 엘리자베스의 히스테리는 오늘날의 진단명에 따른다면 CRPS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히스테리는 이런 식으로 위장해서 등장하기도 합니다.
에드워드를 구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도덕적 갈등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라이저의 히스테리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규범에 매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유부녀에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는 겁니다.
에드워드를 구해야 하는 상황은 묶여 있었던 규범의 틀을 깨는 사건을 통해 자신의 히스테리 증상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된 것 아닐까요? 그 질문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있을까?’라는 겁니다. 결국 사랑 문제와 관계됩니다. 겉으로 말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 몸이 대신 말을 해주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체화 장애의 내용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저는 히스테리 증상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만 성격 차원에서 히스테리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용감한 모습도 부드러운 모습도 지니고 있습니다. 지적인 데다가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인내심도 강한 데다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히스테리 증상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다 보니 이런 말까지 있습니다. ‘증상에 무관심한 미녀의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프랑스에서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표현한 말입니다.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일라이저의 히스테리와 같은 관념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희귀할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비슷한 메커니즘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인터넷에서 글을 읽다가 감동을 느끼는데 어떤 사람의 말이 그 감동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언어가 정신적 흥분을 일으킬 수도 있고 사라지게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샤르코가 최면을 일으켜서 히스테리 증상을 발생시키고 치료하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악플을 다는 것 역시도 그와 같은 흥분을 발생시켜서 사람을 괴롭게 만들 수 있는 거죠.
구속에서 풀려난 에드워드는 사일러스를 찾습니다. 그리고 사일러스는 자신의 과거를 재현하고 있었죠. 고통에 시달리는 부상병들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총으로 쏴버립니다.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려는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살하려고 하지만 총알 부족으로 인해 실패하고 맙니다.
사일러스는 과거 군 시절의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던 중이었습니다. 우리 정신에는 자극 보호대가 있는데, 그 자극보호대를 뚫고 들어오는 경험이 정신에 타격을 주게 된다는 겁니다. 이 사건을 다시 떠올릴 때의 괴로움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트라우마와는 그 차이가 꽤 큽니다. 내가 불편한 상황이랑 트라우마는 그 차이가 어마어마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환영의 문제를 좀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사일러스는 환영을 보고 그에 맞춰서 행동했습니다. 물론 정신병에서도 환영을 보긴 봅니다. 그런데 히스테리에서도 환영은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에는 환각을 경험하게 되면 조현병이라는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환각의 문제를 단순 정신병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치료사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수련 과정에서 환각을 다뤄본 경험이 없다면 겁부터 먹을 수도 있죠. 그래서 약부터 먹으라고 권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 심리상담에서는 그러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정신분석에서는 환각 자체가 정신병의 근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진단도 충분히 나옵니다.
사일러스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죠. 사일러스가 경험하는 내용은 그가 견딜 수 있는 자극의 크기 이상이었습니다. 부상병들을 살해한 그의 행동은 어떻게 선택된 것일까요? 고통에 울부짖는 부상병들을 보기 힘들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부상병들이 고통에서 해방된다면 울부짖는 것도 멈출 겁니다. 죽음도 그 결괏값은 같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병리적 판단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본다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엉뚱함을 발생시키는 것이 신경증적 판단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사일러스가 왜 그런 백일몽에 빠져든 것일까요? 전기치료 직전 에드워드가 보여준 사진이 최면을 걸게 한 것일까요? 이 부분은 제 생각에 명확하게 각색한거라고 여겨집니다. 극적 장치죠. 과거 자신이 살해했던 부상병들을 떠올리게 한 겁니다. 그것이 단서가 되어서 그는 백일몽에 빠져들었고 그의 정신이 붕괴되는 끔찍한 상황을 견디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으로 임상을 왜곡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습니다. 임상문제를 적절히 가공해야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 내외의 정신질환 관련 드라마 치고 임상을 날것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작품에 맞게 짜여진 세계관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장치로서의 정신병이고 그게 현실과 닮아 있지만 현실은 아니거든요.
다시 사일러스의 상황을 떠올려봅시다. 현대의 정신과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진단에서 ‘반복적인 꿈’을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괴로운 상황을 자꾸 꿈에서 반복하니까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여기서 그런 의미를 추출해 냅니다. 같은 상황이 다시 닥쳐오게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인 겁니다. 가장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죠. 이러한 경우가 상당히 많지만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 속의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스톤 허스트 수용소는 다시 평범한 일상을 되찾습니다. 어느 날 두 명의 남자가 찾아와 수용소의 분위기가 엉망이라고 평가하며 근무 중인 의사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의외의 사실을 말합니다. 에드워드 뉴게이트라는 의사는 치료가 불가능한 공상허언증 환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에드워드 뉴게이트라는 것을 밝힙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가 공상허언증 환자라고 한다면 단순히 ‘거짓말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혹은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이야기도 할 수 있겠죠.
증상을 통해 만족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럴 때는 치료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영화에서 보여준 에드워드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의 행동은 설득력 있는 가설을 통해 정신의학이 기대할 수 없었던 치료효과를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남자가 접근할 수 없는 일라이저의 히스테리에도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정신의학적 치료를 생각해 볼 때, 치료 불가능이라는 말은 교정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치료대상이 아니라 처벌대상으로써 수용소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치료란 강제로 실시할 수가 없습니다. 병들어서 살고 싶은 사람은 병들어서 사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이 부분을 사람들은 ‘치료의지’라는 말로 곧잘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치료의지’라는 말은 혼자서 ‘나아야겠다!’는 단순한 언어표현이 아닙니다.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이 그 치료의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과 대면한다는 것은 꽤 불편합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램 박사의 명의를 가진 에드워드가 일라이저와 춤을 추면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정신질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낙인을 지니고 있을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