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의 감금은 치료적인가?
실화를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 <날, 보러 와요>는 정신병원 강제입원에 대해서 고발하는 내용이다. 강제입원, 당사자 의사를 무시한 채로 끌려가는 상황을 상상한다면 끔찍하다. 물론 강제입원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끔찍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가족이나 도박중독에 시달리는 가족을 강제 입원시킨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부당한 강제입원의 사례는 부지기수다.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해서 청소년인 자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녀를 강제 입원시키는 경우도 있다. 어떤 식이든 진단명은 붙여지게 된다. 이런 경우 진단명이 좀 어이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인지능력도 일반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데 정신지체 진단을 해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경우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행실이 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부모에 의해서 입원된 경우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원은 영화 속의 은성 병원처럼 잔인하지 않다. 따뜻하고 친절한 곳도 많다. 그러나 강제입원과 폭력 등은 간간이 뉴스에서 나온다. 생활 전반을 관리 감독하고 있는 보호사에 의해서 폭력은 이루어진다. 정신병원을 다룬 작품에서 보호사가 악역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힘으로라도 말을 듣게 하겠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실화가 하나 있는데, 과거 남편의 알코올 중독이나 주폭으로 인해서 고통받던 아내들이 자주 찾던 병원이 있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기괴했는데, 환자들의 간식비가 입금되면 그것들은 모두 보호사에게 주는 상납금처럼 변했다. 물론 내가 알기로 그 병원은 너무 많은 민원으로 십여 년 전에 폐원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와 친분이 있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의 강제입원 장면은 상식적이지 않다.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강제입원'이 과연 '치료적'인가 하는 점이다. 강제입원을 당하는 것은 불쾌하고 고통스럽다. 이것이 과연 '치료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잠시 신경증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본격적인 발병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현실에서 후퇴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감도 없어지고 현실에서 한발 물러서고자 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상생활의 포기를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떨어진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치료에 전념하는 경우, 증상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이런 상태에 처해있는 당사자에게 강제입원을 시킬 이유는 없을 것이다. 증상별로 나타나는 양상이 다르다. 그러나 강제입원이 필요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강제입원이 '치료적'일까?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공포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을 두고 '치료'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말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정신의학의 초기를 되짚어보면 '도덕 치료'라는 치료방식이 있었다. 도덕 치료에서 효과적인 치료방식으로 기록된 것은 환자에 대한 구속의 내용인데 그 내용은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구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산업혁명 이후의 수용소 치료에서 그 정신이 사라졌다. 물론 당시의 수용소 치료는 실패였었다.
정신질환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권리 회복'이다. 일상생활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밑거름인 자기결정 권리를 무시하는 내용은 결코 치료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상황이 갈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더 높다.
2~30대 여성이 남자 보호사에 의해서 강제로 목욕하게 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몸을 함부로 보여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절차라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병원에서는 그 일이 일어났다.
정신병원에 대한 묘사 중 '가장 경계 수준이 낮은 보안시설'이라는 말이 있다. 격리 대상으로써 정신질환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태도에는 저항할 필요가 있다. 치료든 생활이든 사회에 통합이 되어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좋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문명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사람'으로 평가되는 기준도 변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비만'이 전염될 수 있다는 과학 기사를 읽었다. 경계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전염되는 비만을 가진 사람 곁에는 다가가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불쾌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 곁에는 가지 않으려고 한다. 전혀 아무 상관없을지라도 말이다.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 외모의 문제도 포함이 된다. 함께 다니는 것이 부끄러움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마음이 아픈 사람의 곁에 있지 않겠다는 태도가 생겨날 수도 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처벌받아야 하는 사람, '제물'이라는 말이다. 신경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신세한탄 중에서도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아무 잘못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다. 그렇다.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
열심히 살고, 현실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다가 지쳐서 발생한 결과가 신경증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것도 아니다. 발병한 신경증은 개인을 괴롭히며 일상생활을 포기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죄'라고 설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상행동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망상으로 인한 행동과 말은 일반에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설명보다는 판타지스러운 설명을 더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수아와 자궁을 바꾸자고 한다. 신체 장기를 바꾸자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말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듣기보다는 말을 멈추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망상에 깨끗한 자궁의 이미지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탐구할 필요가 있다. 망상이 그녀의 현실에 대한 인식에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보인 반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녀의 자궁은 생활에 대한 보장으로 재활용되고 있었던 셈이다.
반면 더 냉철한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녀의 생식기는 병원 내에서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담보'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또는 모순된 그 어떤 의미들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생식기를 바꿔달라는 요구에 담긴 의미는 엉뚱한 소리로 치부할 것은 아니다. 즉, 생식의 기능을 하지 못해 자기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차라리 죽고 싶다>로 재번역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정신병원에서는 강간 사건도 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외국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고통을 호소해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유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격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듯한 태도다.
진단명이 낙인이 되어 그들의 인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그마가 무서운 것은 이 점이다. 찍힌 낙인이 인격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그 말로 정의되어 버린다. 경계선 인격장애다, 혹은 강박증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라 조심해야 한다, 이상한 사람이다.... 낙인으로 그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인간은 낙인만으로 설명될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증상에 대한 불안감으로 진단명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오진이라고 할지라도 진단명을 발견했을 때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쉰다. 증상으로 인해 발생될 미래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능동적으로 치료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정신문제를 다루는 것은 상당한 저항을 극복한 뒤에야 다룰 수 있다.
은성 병원의 원장은 법이 설치된 테두리를 피하고 있다. 그는 법에 의해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가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는 태도다. 자신의 실리를 위해서 인간의 가치를 한없이 깎아내리는 것. 그는 자신의 병원에 치료를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을 '인격'이 아닌 진단명에 의한 '물건'으로 보고 있었다.
소시오패스를 어떻게 쉽게 설명할까? '치사한 놈'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실리만을 따지는 사람이다. 이 의사는 자신의 실리를 위해서 타인의 권리를 착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일이 알려지게 될 위기 상황에 처하자 그는 죽음을 선택한다. '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소시오패스는 법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한다. 그래서 교묘하게 법을 피해 다니면서 실리를 취하려고 한다. 변태는 궁극적으로 그 스릴을 즐기는 것이다. 법에 의한 처벌이 명백해질 때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잘 피해오던 법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는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개인적으로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 영화였다. 강제입원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치료와 관련되는 내용이다. 실제로 강제입원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내용은 tv에서도 종종 접할 수 있었다. 권리가 한쪽에 일방적으로 몰려 있는 법이 통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개정된 정신보건법의 내용은 당사자들의 권리에 대해서도 심각한 침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경찰이 강제입원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정신병원이 치료적인 수단이라기보다는 <보안 수준이 취약한 교도소>라는 의미로 작용하지 않을까?
현실을 고발하는 성격의 영화는 드러나는 현상의 이면을 보고자 하며 폭로한다. 최근에도 이와 비슷한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는가? 끔찍한 현실의 문제를 다룬 영화는 사회참여적이다. 이 것은 이미 우리의 근대사에서 정치인들이 탄압을 견디면서 실천했던 것들이다. 이 영화는 복잡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메시지는 실로 단순하다. 무엇을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는가?라는 것이다.
얼마 전 있었던 강남역 사건과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은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켰고 관련법 개정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눈가림 속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