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공포는 어떤 의미였는가?
우리는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감정적인 두려움이 치는 순간을 <공포>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공포>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 극복이 될 수 있을까? 이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의의가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무대 공포증>이 있는 바이올렛의 이야기는 각종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바이올렛의 <무대공포>와 사람들이 말하는 <벌레 공포>는 좀 다르다.
바이올렛은 뉴욕에서 작곡가로 독립하기 위해서 집을 나선다.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여러 가지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안 좋은 사건들은 그녀의 삶에서 좌절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녀가 야심 차게 준비한 데모 테이프를 들어주는 기획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가 구한 자취방에는 도둑이 들었다.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털려버렸다.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을 구해야 했다. 그곳이 바로 코요테 어글리라는 술집이었다. 술집이지만 쇼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일종의 쇼바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유흥업이라는 점에서 편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업적인 프로정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프로란 자신의 일을 통해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것은 모든 업종에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는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프로>가 되기까지의 고군분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이올렛이 준비한 데모 테이프만 듣고 덜컥 합격이 되는 순진한 상상을 누구나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쓰는 작가라고 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내 경험도 그랬었다. 첫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 수십 군데의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그러나 결국 되지 않아서 자가출판으로 진행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아니다. 현실의 문제는 냉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무대공포>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바이올렛의 믿음이다. 그녀는 이 것이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질환이 유전이라고 믿게 된다면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모조리 막힌다. 그래서 바이올렛이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라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서 프로가 된다는 것은 작가가 인세로 먹고살아가는 것과 같다. 자기 노래의 저작권료로 먹고살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재능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난다. 코요테 어글리에서 일을 하면서 흥분한 손님들이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들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바이올렛에게는 자기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된다. 어쩌다 우연히 그녀의 데모 테이프가 재생된 것이다. 그녀는 바에 올라가서 자기 노래를 립싱크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노래가 나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노래에 손님들은 진정되고 그녀에게 매료된다.
데카르트의 문장을 생각해보자.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 멋진 장면은 데카르트의 문장을 멋지게 비틀어 놓은 라캉의 문장으로 우리를 안내해줄 것이다. <나는 생각할 때 존재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것들은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가장 흔한 예시로 게임하는 순간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을 때, 난이도가 높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들기 시작할 때, 그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없다. 게임할 때, 아무 생각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우리는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공포>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이올렛은 생각하고 있을 때,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할 때,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그 순간이 엄청난 쾌감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공포증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 공포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공포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을 때, 습격하듯이 덮쳐 오는 것이다. 두려움을 일으키고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이런 반응이 공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진정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래하고 싶지만 노래할 수가 없다. 노래를 너무나 원하기 때문이다. 고소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관념에서는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자 하는 것에 대한 반대 관념이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가장 낮은 위치에서 아무런 책임 없는 태도를 취하고자 하기도 한다. 바이올렛이 경험하는 무대공포란 이런 수준의 공포가 되지 않을까? 그녀는 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발현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끔찍한 리비도에 직면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것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는 순간이 될 것이다.
바이올렛의 무대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싱어송 라이터들은 자신의 노래를 직접 부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믿음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녀가 어머니에 대한 동일시 작용이 있다는 점에서 살펴보아야 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그녀는 오디션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는데, 그렇게 되는 결정적인 조건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무대공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바이올렛이 그동안 갖고 있었던 믿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격파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바이올렛을 양육하기 위해서 무대를 포기했었다는 것이다. 결국 무대에 서는데,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두려운 것이 무대공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관객의 시선이 두려운 것이었다. 결국 그녀가 시선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코요테 어글리로 돌아가 보자. 그녀가 손님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것이 어쩌면 수치스러움과 직결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것에 끔찍한 욕망이 묻어 있었고 그것을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디션 무대에서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 시선들이 전해주는 흥분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영화의 엔딩에서 실제적인 바이올렛의 욕망 문제를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코요테 어글리의 주제가 Can`t fight moon light를 부른 실제 가수가 누구인가? 리앤 라임스다. 그전까지는 그렇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코요테 어글리 이전에 그녀는 CCM 음반을 발매한 적이 있다. 과거 CCM의 명곡인 데비 분의 You light up my life를 리메이크해서 앨범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장기간 CCM차트를 장악한 적이 있다. 그녀는 이전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배철수 씨도 리앤 라임스의 노래를 듣고 이렇게 노래를 잘 하는 가수가 있다는 것에 감탄하지 않았는가? 자기 노래를 불러주는 가수가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실을 전달해주는데 바이올렛의 욕망은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에너지를 요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