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반도체, 제3국 통해 중국 간다? .. 정부와 업계의 신경전
월스트리트 저널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규제를 더 확대하려는 정치권과 이에 반발하고 있는 실리콘 밸리의 갈등을 전했습니다.
미국 정부나 정치권은 "제3국을 통해 첨단 반도체가 우회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허점이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다 틀어 막아야 한다. 중국을 지금 잡아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인데 비해, 중국과 거래하는 미국의 대규모 테크 기업들은 "다른 나라 수출까지 규제가 심해진다고? 이러다가 손님 다 없어지겠다"라며 볼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I. 동남아와 중동 수출도 규제
이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바이든 행정부가 AI 칩의 글로벌 판매 제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내놓은 새로운 조치 때문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미국 상무부가 그래픽 처리 장치(GPU)의 글로벌 수출 라이선스 체제를 도입하고, 특히 동남아시아와 중동의 데이터 센터를 통해 중국이 AI 칩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허점을 차단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일부 국가를 통해 중국이 미국의 첨단 AI 기술을 빼내간다는 보도가 미국 내에서 계속되면서 결국 추가 조치가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업계가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라클 켄 글루크 부사장은 블로그를 통해 “규제의 정점이라 불리는 이 계획은 미국의 이익 보호보다 극단적인 규제 과잉을 초래한다”라고 불만을 내놨습니다.
2022년 10월부터 시작된 바이든 행정부의 대 중국 첨단 반도체 규제가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실제로 중국이 엔비디아의 최첨단 칩을 잘 구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규제가 확대되면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II. 중국의 꼼수를 막아라
미국 정부나 정치권의 대중국 강경파들은 "규제가 좋은 의도로 만들어졌지만, 중국이 미국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우회 경로를 남겨두었다"며 추가 규제를 주장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했습니다.
그리고 정치권의 불만은 엔비디아를 위시한 최첨단 기술 기업들에게 향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엔비디아의 예를 들었습니다.
"미국의 첫 번째 수출 통제 조치가 나온 몇 주 후, 엔비디아는 미국 수출 라이선스가 필요 없도록 조정된 새로운 중국 시장용 칩을 출시했습니다. 1년 후, 미국이 규제를 업데이트하자 엔비디아는 다시 수출 금지를 피할 수 있도록 중국용 칩을 업데이트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엔비디아가 법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미국 당국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상무장관 지나 레이몬도는 수출 통제를 둘러싼 업계의 저항에 대해 좌절감을 표출하면서 “우리는 중국의 위협에 대해 눈을 뜨고 함께 대처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III. 기술업체의 반발
물론 엔비디아 측은 “회사가 모든 관련 수출 통제 법률을 준수하며 고객들 역시 이를 준수하도록 요구한다”라고 맞받았습니다.
팔지 말라는 최첨단 칩은 팔지 않고 있고, 다른 구매자에게도 엔비디아 제품을 산 뒤 중국에 빼돌리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외려 제3국에 대한 반도체 규제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미국 거 안 쓰겠어. 품질 떨어지더라도 중국 것 쓰겠어'라는 식으로 미국의 산업 리더십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엔비디아 측은 "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대상으로 한 마지막 순간의 수출 제한 규칙은 오용의 위험을 줄이지 못할 뿐 아니라 경제 성장을 위협하고 미국의 리더십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또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대기업들을 대표하는 워싱턴 소재 단체인 정보기술산업위원회는 정부가 이런 규제를 내놓으면서 기업들과 협의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논리는 비슷합니다.
"미국 기업들이 첨단 칩이나 서버를 해외에 판매할 때마다 워싱턴의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면, 고객들이 지쳐 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중국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큽니다. 비록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말입니다"
이 단체는 또 "(AI 관련된 반도체에 대한 지나친 규제가) 전기차와 태양광 패널 같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 기업들이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사례를 반복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라고도 우려했습니다.
IV. 강경한 정치권
트럼프와 바이든 정부 양쪽의 의원들과 전직 백악관 직원들은 "미국의 첨단 AI 기술이 해외로 판매될 때마다 중국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를 철저히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보도했습니다.
마치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판매한 최첨단 전투기를 중국에 재판매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라는 취집니다.
새해 들어 미국 하원 중국 공산당 특별위원회는 중국이 미국 첨단 기술에 접근하기 위해 제3국을 통하는 불법적인 방법과 허점을 이용하고 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할 정도로 정치권은 강경합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런 기조가 트럼프 2기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습니다.
트럼프 당선인은 최근 수출 통제에 대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트럼프 1기 중국 통신 장비 선두업체 화웨이와 기타 중국 민간 기술 기업들이 미국 첨단 기술에 접근하고 있다면서 요란하게 이를 차단한 바 있습니다.
업계의 볼멘 소리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바이든-다시 트럼프로 이어지는 미국의 핵심 권력은 '중국의 첨단 기술 훔치기'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는 게 월스트리트 저널의 시각입니다.
PS.
일단 트럼프 2기 내각에는 중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차기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된 마이클 월츠 하원의원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활동을 자주 비판하면서 “미국이 이 지역의 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의 타이완 침공 우려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국무장관에 임명된 마르코 루비오 상원 의원은 의회 내의 대표적인 ‘중국 매파’입니다.
신장 위구르 족에 대한 인권 탄압을 거론하면서 관련 제품의 미국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 하는 등 중국에 불만이 많은 의원입니다.
국방장관에 지명된 폭스 뉴스 해설자 피트 헤그세스는 중국이 미국을 물리치는데 초점을 두고 군대를 강화하고 있다면서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조해왔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또 트럼프의 국무부 경제정책 및 무역 고위 관료로 임명된 제이콥 헬버그는 중국의 부상을 우려하는 기술 투자자 및 의원들의 컨소시엄 설립자라고 전했습니다.
미중 패권 전쟁에서 중국을 경제적, 군사적으로 모두 눌러놔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첨단 AI반도체칩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본격적인 AI의 등장 이후 첨단 반도체는 이제 전투력의 바탕이 됐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를 입증했고, 팔란티어라는 기업의 주가 폭등도 '달라진 전쟁'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AI와 관련된 첨단 칩에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게다가 기업 친화적인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철회될 가능성도 높지 않습니다.
트럼프 2기 대변인 캐롤라인 레빗은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중국에 맞서고,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며, 미국을 다시 강하게 만드는 데 힘쓸 트럼프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그는 그 약속을 이행할 것입니다"
이제 첨단 기업들은 미국 정부 입장이 바뀌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줄어든 중국과 친 중국 국가로의 수출 물량을 어느 지역 판매로 채워나갈지 고민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