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꾀나 방법을 생각해 냄
"엄마, 오늘 수학 선생님이 한 명 한 명 상담했는데 나 겨울방학에도 계속 다녀야 돼."
"어? 이번 겨울방학에는 수학 쉬기로 했잖아."
"근데 선생님이 아까 그러시는데 지금 우리 반이 중3 겨울방학에 미적까지 끝내는 진도래. 고등학교 가서는 수능 공부만 하면 된데."
"야, 그게 말이 되냐? 배운다고 다 아냐? 진도 뺐다고 100점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엄마, 지금 우리 반에 우리 학교 애들이 6명이나 있단 말이야. 우리 반 애들 좋단 말이야. 계속 같이 다니고 싶단 말이야."
"아니, 겨울방학에 쉬기로 했다고 선생님한테 말하기로 했잖아."
"아니,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니까. 엄마, 나 겨울에 그냥 학원 다닐래. 특강도 할래."
"배신자. 너 설마 영어학원도 방학 특강, 그거 너랑 친한 애들이 신청 많이 하면 너도 하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말해봐! 너 만약에 너네 반 애들이 거의 절반이 특강 신청한다고 하면 안 할 수 있어?"
"..."
"왜 너는 맨날 친구주도학습이야 증말. 엄마들 한 명 한 명 전화해서 설득이라도 해야 하냐."
어쩐지, 너무 명쾌하게 풀린다 했다. 이러면 애 둘 학원비가 2달간 각 200씩 400에 육박하게 된다.
설마 중2 엄마들이, 예비고1도 아닌데, 영어학원 겨울특강을 보내겠어? 안 보내실 거죠?
어, 잠깐. 이러면 내년 겨울방학에는 예비고1이라고 수학특강 영어특강에 과학도 보내야 할 텐데 장난 없네!
기어 3단 정도였던 마음이 순식간에 7단까지 올라갔다.
내가 그래도 물류센터를 1년 넘게 다녔는데. 잘 팔리는 거 느낌 아는데. 전자상거래소매업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휴업으로 묶어뒀던 사업자등록을 풀었다. 재개업 사유는 '개인 사정'. 어제 산처럼 들어오던 인형 털 슬리퍼, 그걸 팔아볼까?
유튜브를 봤더니 하루 3개 정도 팔리는 상품을 공략하라고 했다. 그건 내가 알지, 인형 꽃다발. 어린이집 재롱잔치가 시작되는 12월부터 졸업입학 3월 2일까지. 꾸준히, 진짜 꾸준히 나간다. 다이소에서 쿠로미 인형 사다가 집에서 만들어가지고 로켓그로스로 팔면 하루 3개는 나가겠지 당연히. 강아지 영양제는 1년 내내 많이 팔리고. 에 또...
이틀간 유튜브를 8시간씩 보면서 공부했다. 내 취향이 아니라 반드시 데이터 기반으로 물건을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템스카우트, 네이버 데이터센터, 도매꾹, 시크릿모드, 챗GPT 다 후벼 팠다. 닥등이 필수라 하여 잘 팔릴 것 같은 털슬리퍼를 하나 골라 배운 대로 잘 팔고 있는 사람들 것과 비슷한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가격을 조정해서 등록했다. 다음 건 더 빨라지겠지. 미리캔버스는 아무래도 손에 익질 않아서 일단 포토샵 구독을 하고 엑셀로 나만의 마진계산기도 만든 후 유튜브를 켜놓고 상품 서칭을 하고 있는데, 내 슬리퍼가 등록한 지 5시간 만에 아이템위너로 묶인 것을 발견했다. 유니크했다고 생각했는데. 검색해 보니 분명 어제만 해도 없었던 내 털 슬리퍼, 온 동네가 다 팔고 있었다.
침울
뭔가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유튜브와 챗GPT를 파고 또 팠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이건 나랑 안 맞는 일인데-라는 생각만 커졌다. 나는 물건 사는 일을 즐기지 않는데. 나는 물건 사는 일이 고역인데.
치약을 예로 들자.
처음에는 암웨이 치약을 썼다. 새언닌가 누군가 암웨이 시작하면서 줬는데 상쾌함이 남달랐다. 그러다가 가격을 깨달았고 바꾸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마트에서 3개 묶음으로 세일하는 걸 샀다가 그 치약을 다 쓸 때까지 거의 반년 간 애들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치약이란 무엇인가-로 서칭이 시작되었고 불소 함량을 비롯한 성분 전체에 대한 정보를 찾은 후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적합한 제품을 선별하고 그 치약의 향- 탑 미들 베이스 노트를 확인한 후 단위 당 가격을 비교해서 2080으로 결정(중간에 상쾌함을 못 잊고 암웨이를 한 번 더 샀었다). 어느 날 아빠가 여행 가셨다가 흑인 치약이래 재밌지? 하면서 치약을 주셨는데 다 쓴 후 돈 주고 사려니 비싼.. 그러다 동생들이 또 여행을 갔다가 마비스를 사 오는 바람에 남편이랑 나는 페리오 묶음 상품을 쓰고 애들은 마비스를 주는 걸로 해결된 줄 알았으나 나는 아니고 쟤가 그런 게 분명한 치약 뚜껑 안 닫기 반복과 그 비싼 것을 줄줄 흘려서 촛불형상을 만들고 중간(!)부터 대강 짜서 쓰다가 한-참 남았는데 새 걸 뜯고 하는 애들을 보며 너네는 비싼 거 쓸 준비가 안 됐다고 설득(?) 후 아묻따로 뚜껑이 없는 펌프형 히말라야 핑크솔트를 샀는데 너무 맛이 없어서 이를 잘 못 닦겠으니 리스테린과 오랄비 왁스 치실을 추가 구매해 달라고...
전 지구를 뒤져 가장 적합한 '그것'을 사야 한다는 강박이 살짝 있다. 아니, '그것'을 사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옷도 1년에 하나를 살까 말까 하는 수준이다(외출할 때 입는 겉옷 한정). 마침내 '그것'을 찾아내면 3개씩 구매한다(3개 사두면 15년 정도는 이 짓을 안 해도 되니까).
그런 내가 닥치고 하루에 10개씩 100일 간 1000개 상품 등록이라니. 내가 써보기는커녕 실물을 본 적도 없는 물건을 팔아야 한다니. 존재론적 괴리가 나를 감싸는...
너 엄마가 이렇게 힘들게 벌어서 너 학원비 내는데 이렇게 자꾸 지각하고 숙제도 안 하고 시험 점수도 별로면 못 가게 할 거야! 학원이 놀이방이니? 영어실력 성장하라고 학원 보내는 건데, 예전보다 점수가 올라가야 할 거 아냐. 이번 기말고사에 또 평균점수보다 낮게 나오면 너 진짜 학원 못 다닐 줄 알아!
인성교육을 위한 꾸지람이 순식간에 협박으로 마무리되었다. 내가 이젠 아이에게 협박을 하는구나. 화풀이 하는 그런 엄마가 되었구나.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침팬지 같은 중2 아들은 대미지가 1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억이나 할까...
대책을 수립하기는 커녕
왠지 앞으로 애들과 더 자유(?!) 분방한 대화(?!)를 주고받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