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성

부드러운 성질/서로 관련이 있는 성질

by easygoing

올해 특별한 일이 있었어?


연말에 누군가는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물어봤다.

12월 31일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안 물어봤다.

쳇.


뒤로 깍지 끼고 손목 돌리기가 가능해졌다.



남동생이 만날 때마다 내 어깨를 뒤로 꺾어가면서 이그 어깨 말린 거 봐! 구박을 해서 니 허리나 펴고 다녀! 맞받아쳤다. 아니, 내가 오른쪽 상완골 전방 활주를 응? 라운드 숄더 아니라고 내가 응? 오랜만에 남매 돋네!


그 동생이 지난여름 갑자기 회전근개파열로 수술을 했다.

수술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흥(?)이 오른 나는 몇 달에 걸쳐 오른쪽으로 누워자던 습관을 고치고 베개를 바꾸고 마사지와 스트레칭을 매일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과격한 보조기구를 둘러메고 온 남동생 앞에서 뒤로 깍지를 끼고 손목을 한 바퀴 돌려가며 라운드 숄더와 상완골 전방 활주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타격감이 없었다.


너나 나나 내일모레 쉰인데 이런 지적질이 다 무슨 소용이냐. 에구 이게 뭐야. 아프겠다. 머리는 며느님이 감겨주시는 거야? 너는 머리카락은 가는데 기름이 많아서 유쾌하진 않을 텐데... 고생이시다.




연말 토요일 저녁, 수시로 바뀌는 티맵 경로 덕분에 구석구석을 돌아 돌아 목동까지 운전해 가는 2시간 반. 십 수년 만에 지나는 모든 길에 추억이 없는 곳이 없었다(이게 바로 고향 방문!). 그런데 갑자기 기억의 시점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눈길 닿는 곳마다 생생하게 쏟아지던 고통과 슬픔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시간 속의 내 모습이 다 예쁘고 애틋하게 보였다. 에구 고생 많이 했지. 저기도 갔었지. 나 참 열심히 했네. 저 때 되게 기분 좋았는데. 그리고 곧, 울고 웃는 내 곁에 늘 누군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사람들이 안전망이었다. 버틴 건 혼자 했지만 안 죽은 건 저들 덕분이었다.



우울증 책을 내고 만남(?)이 있을 때마다 책 앞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날을 맞이하시길 빕니다.'라고 적어드렸다.


뒤로 깍지를 낄 때마다

견갑골과 함께 내 안의 무엇인가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내가 뒤로 깍지를 껴서 손목을 돌리는 걸 자랑할 때마다 주변 모든 사람들도 다 되는 것에

나는 보여줄 때마다 저들처럼 한 번에 안 돼서 있어봐 봐~ 해야 하는 것에

매번 충격을 받는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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