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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세시공작소 Nov 15. 2021

저팔계 프로젝트: 왜 나를 싫어하나?

밈과 양극화

집 앞에 있던 편의점이 없어졌다.

정확한 폐업의 사유는 모르겠으나, 나는 어쩐지 얼마 전에 있었던 어느 편의점 브랜드의 혐오 광고 논이 떠올랐다. '혹시 점주가 이 일로 피해를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대체 점주는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대체 누가 이런 못된 걸 만들었지?' '아니 본사는 왜 대응을 이렇게 밖에 못한 거야?'

하지만 다음날 날이 밝고 나서 같은 장소를 지나며 뒤늦게 메모를 하나 발견했다.

리뉴얼 기간. 더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며칠 후 편의점은 새로운 디자인의 간판을 달고 영업을 재개했고, 나는 안도감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왜 혼자 멋대로 판단하고 왜 그렇게 화가 났었을까?


얇아진 '감정의 범퍼', 그리고 인터넷.

코로나 이후, 우리에게 생긴 변화 중 하나. '감정의 범퍼'가 얇아졌다.
(중략) 우리 모두에겐 밖에서 오는 감정적인 충격을 흡수해주고,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는 시간을 지연시켜주는 '범퍼'가 있었는데, 그것이 아주 얇아진 것만 같다. - 유병욱, 없던 오늘


뉴스 기사나 유튜브 등등에 달린 댓글을 보다 보면, 부정적인 댓글과 이것을 공격하면서 싸우는 댓글이 한두 개쯤은 꼭 보인다. 가끔은 건강한 토론도 있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주로 특정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혐오하는 내용이었다. 그 밑에는 이에 대응하는 또 다른 혐오 댓글이 있다.

그렇게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콘텐츠는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복합적이다.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극단적이기만 한 걸까? 물론 인터넷 뒤에 숨어 다소 은밀한 방식으로 진짜 생각을 드러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다는 인간의 본능이다. 사람들은 재밌어서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한다. 이런 특성을 특정 세대에 국한된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플랫폼이 너무 일반화되었다. 요즘은 60대 이상의 어르신들도 유튜브를 보고 댓글을 단다.

콘텐츠와 연관된 경험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출처: 유튜브 강유미 좋아서 하는 채널)

커뮤니티는 더욱 세분화되고 있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쏟아져 나온 '밈(meme)'과 '짤(짤방, 잘림 방지 gif)'은 점차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머와 풍자는 상당한 고급 언어이다. 이건 왜 기분이 나쁜 걸까? 이건 왜 웃긴 거지? 밈의 배경을 모르고 보면 공감하기 어렵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더 세밀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이런 감수성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뭐든 빠르게 흘러가는 이 시대와 마찬가지로.

짤과 밈은 오늘날의 세상을 기록하는 실록과도 같다. 두 전화기의 차이점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게시물은 돌도끼와 청동검을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사회적인 감수성이나 반응은 어떤 기업이나 개인이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데에 한계가 있고, 그런 노력을 증명하기도 쉽지 않다. 이제 어떤 콘텐츠에 대한 평판을 예측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졌다.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광고가 문제가 제기된 이후에는 비슷한 광고를 볼 때마다 '혹시...?' 하고 의심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원래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더더욱 묻혀 버린다.

나는 나는 저팔계 왜 나를 싫어하나
나는 나는 저팔계 도대체 모르겠네
나의 심술 때문에 나를 그렇게 싫어하나
나도 알고 보면은 너무나 착한 사람이야
저팔계의 노래가 몹시 공감되는 요즘이다. (출처: KBS [만화동산] 날아라 슈퍼보드)

이것 참 이상하다. 분명 과거에 비해 개개인의 다양성이 더 존중받는 세상인데, 공격도 더 쉽게 당한다. 젠더 갈등이나 PC(Political Correctness) 주의 논란을 보면 이런 사회적 감수성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사회의 문제다.

대체 왜 그렇게들 싫어하고 싸우는 걸까?


'맞춤형 서비스'의 함정: 보고 싶은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 사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런 서비스들은 수익을 위해 AI를 이용해서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맞춤형 콘텐츠를 끊임없이 추천해준다. 그렇게 알고리즘은 광고 수익을 위해 점차 사용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도록 진화해왔다. 자연스럽게 사용자의 취향과 상반되는 생각이나 주제는 노출될 기회가 줄어든다.

이런 서비스들이 어떤 목표를 갖고 혐오를 조장한다기보다는, 이것은 많은 광고 수익 기반의 서비스가 가질 수밖에 없는 맹점이다. 사용자 수, 클릭 수가 곧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어그로'를 끌더라도 자극적인 콘텐츠의 조회수가 더 높다. 그러나 논쟁은 피곤하다.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을 주고받는 것을 선호한다. 커뮤니티에서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목소리가 두드러질수록 중립을 지키는 이들은 점점 침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터넷 상에서는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더 왼쪽으로,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더 오른쪽으로 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다시 영향을 받는다.

서비스는 점점 개인화되는데, 오히려 사고는 'A 아니면 B'로 경직된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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