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도 맵빨이다
인류사 맵(map)빨이다.
저명한 인류학자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그랬다. (물론 아니다. 근데 누가 책 리뷰에 그렇게 써놨다.) 여건이 된다면 누가 서울에 살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서울 촌놈인 나도 사실 회사가 아니면 수원에 살 이유가 없었다. 집 앞에 다이소도 지하철도 없고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이곳의 삶은 너무나도 무료했다. 누군가는 차를 사면 해결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보다는 집을 먼저 사고 싶었다. 수술 후 몸이 약해지니 주거 안정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다. 아니, 지금 하는 일을 앞으로 몇 년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더 커졌다고 할까.
회사와 너무 가까이 살면, 삶이 지나치게 회사로 가득 차 버린다. 이렇게 지낼 바에는 근무지를 옮기더라도 대도시로 가고 싶었다. 나는 그저 대도시의 인프라를 누리고 싶었다. 그렇게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 수술 후 회복이 덜 된 몸을 이끌고 재활 삼아 틈틈이 대구에 들러 이곳저곳을 탐방했다.
'대프리카'라고도 불리는 대구는 분지다. 분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낙동강 물줄기가 뻗어 나와 농업에도 유리하니 대구는 삼국시대, 아니 청동기시대부터 이른바 '맵빨'을 제대로 받아온 대도시이다. 왕건이 공격했다가 견훤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던 루트도 현재 대구의 팔공산 일대라 한다.
내가 외지인이고 대구의 모든 것이 새로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도권의 다른 곳들과는 달리 부동산이 아니더라도 대구 곳곳을 탐방하는 것은 왠지 즐거웠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다른 도시를 이렇게 탐구해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지하철 노선도만 보고 별로 멀지 않다고 생각하고 점찍었던 곳이 직접 가보니 말 그대로 시골이었던 적도 있고, 새삼 내가 서울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싶었다. 그때는 수술 후 1년이 되지 않았을 때라 거동은 불편했어도 자꾸 걸어야만 했는데, 덕분에 유익한 재활여행(?)을 했다.
수도권이 아니라 해도 당시 대구 집값은 싸지 않았다. 일부 지역은 이미 투기과열지구인 데다가 넓고 깨끗한 브랜드 아파트는 10억을 호가했다. 대구는 소비도시로, 대구에 사는 사람은 대부분 대구밖에 직장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고속도로 진입이 편한 지역과 기차역 주변은 이미 집값이 비쌌다.
그래도 아직 대부분은 조정대상지역이었고, 데이터로 볼 때 다른 지역에 비해 공급이 많아 집값의 오름세가 주춤한 상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이런 점 때문에 주변에서는 더 뜯어말렸지만, (특히 아버지께서 많이 반대하셨다) 오히려 이 때문에 3, 4년 후 실거주를 목표로 전세가 있는 집을 매매하는 것은 가능해 보였다. 아직 대구에서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에 집을 살 수 있었다. 3, 4년 후에 수도권의 집값과 전세가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갑자기 떨어질 리는 없다. 어차피 지금 당장 수도권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없다면, 대구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젠 몸도 마음도 지쳐서 어디에라도 내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비록 그것이 패닉 바잉(panic bying)일지라도.
대구만 알아봤던 것은 아니었다. 수원, 용인, 동탄 등 현실적으로 직장과 멀지 않은 수도권 지역도 알아봤었다. 집을 알아볼 때마다 '여기는 반드시 차가 필요하겠네' 하는 생각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당시에 가장 발목을 잡았던 것은, 잦은 부동산 정책의 변경으로 대출 규제가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부동산이 참 골치 아픈 것이 아무리 내가 실거주할 것이라도 떨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올라주면 더 좋겠다. 왜냐하면 그래야 은행에서 대출이 잘 나온다. 은행은 담보의 가치를 가능성으로 계산한다. 하지만 호재를 보고 오를만한 지역을 골라 갭 투자를 하는 건 나 같은 부동산 문외한에겐 어렵기도 하고, 투자의 관점으로 접근해서는 매물 찾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도 없었다. 이 지역이 나쁜 게 아니라 그저 내 생활패턴과 지갑사정이 맞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 재계약 시즌이 찾아왔을 때, 결국 나는 아무것도 준비되어있지 못했다. 준비가 필요했다. 현금 비중도 늘리고, 대출규모도 계획성 있게 조정해야 했다. 우선은 기존 계약을 2년 연장했다. 집주인 할머니는 그다음 계약 때는 얼마 정도를 올리고 싶으신지, 미리 넌지시 귀띔해 주셨다. 2년 뒤엔 반드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다음 2년 동안은 코로나가 완화되며 또다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재택근무도 서서히 줄어들고 격리 정책도 완화되어 갔다. 이번엔 다시 변화된 일상에 적응하느라 또다시 아무것도 못하고 두 번째 전세 재계약 시즌을 맞아 버렸다. 다행인 건 회사는 안 잘리고 어찌어찌 승진까지 해버렸다.
다시 한번 대출과 매물을 알아보니 2년 새 집값도 정책도 많이 변했다. 또 그 사이 수원에는 수백억 원 대의 전세사기가 터져버렸다. 전세자금 대출 조건은 점점 더 빡빡해지고 청약은 10억 원이 우스웠다.
아, 이제 진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엔 투기과열지구가 바뀌었다. 이 정도 가격의 집이라면 서울에도 있을 것 같은데...?
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결정이 더 쉬웠다.
이 즈음의 어느 명절에, 아버지께서 '이제 전세 계약 끝날 때가 되지 않았니?' 여쭤보셨었다. 이따금씩 대구 얘기를 꺼낼 때마다 하나뿐인 딸이 정말로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가버릴까 봐 걱정이 되셨던 아버지께서는 당신도 직접 발품을 파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투자목적으로 대구를 알아보는 거라 생각하셔서 직접 대구 지인과 함께 매물을 알아보시기도 하셨단다. 이제껏 부모님께서 한 번도 집을 함께 알아봐 주신 적은 없었다. 늘 이사를 급박하게 정신없이 하기도 했고, 나의 부모님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60년 넘게 서울에서만 살아오신 분들이다. 회사에서 주변지역의 더 많은 정보를 듣는 내가 알아서 잘할 거라 생각하셨던 부분도 있다. 서울도 알아보고 있다 하니 몹시 반가워하셨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서울 곳곳 오래된 동네의 집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사 온 집은 아버지께서 찾은 매물이었다. 어느 산 위에 있는 아파트였는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주차도 불편하지만 교통이 나쁘지 않았고 세대수도 적지 않았다.
처음 위치를 듣고서는 거기서 수원까지 어떻게 다니냐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집도 인연이 있는 것인지 절묘하게도 통근버스가 집 앞에 다녔다. 그것도 생각보다 자주. (코로나 때 증차된 모양이었다) 거기에 내가 알아봤던 다른 매물의 집주인께서 갑자기 매매가를 확 올려버리는 바람에 결정은 쉬워졌다. 출퇴근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게 그리 낯선 곳은 아니라 마음은 편안했다. 일단 버틸 수 있을 때 까진 버텨보자.
그렇게 생애 첫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