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어떤 것들은 마음을 빼앗아간다. 대개 사람은 마음을 빼앗기면 시간을 잃는다. 어떤 것 때문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면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읽을 때, 잘 만든 영화를 볼 때, 가보고 싶었던 콘서트에 갔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쉴 새 없이 떠들던 밤이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다. 알면서도 매번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그것이 편안해질 즈음엔 더 이상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몇 년 전. 회사 복도에 포스터처럼 붙여진 신입사원 인터뷰가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다 심심풀이로 읽어보았다. 한 신입사원은 자신의 목표가 이 회사의 오타쿠가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소 파격적인 인터뷰 본문을 끝까지 읽었다. 그녀에 따르면 오타쿠는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오타쿠가 되고 싶다. 무엇이든 내 마음을 빼앗아주길 바란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컨대 사람들이 나에게 더 이상 어린 나이가 아니라고 할 때부터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지켰다. 겉모습, 어투, 마음가짐, 노력의 정도. 어느 것도 마음을 빼앗겨 흐트러지면 안 됐다. 어리지 않다는 것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쓴다는 말이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사회화 혹은 어른. 어른은 재미없이 이익만 추구하는 게 오타쿠와는 항상 거리가 멀었다.
내 일생의 오타쿠 대상은 해리 포터였다. 서양에서는 내 또래 친구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로 해리 포터를 좋아하는 걸 뽑는다고 한다. 90년대 중반에 첫 책이 나왔고, 2011년에 마지막 영화를 개봉했으니, 막을 내린 지 벌써 15년이 흘렀다. 처음 해리, 론, 헤르미온느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 2001년도에 영화로 개봉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었다. 친구가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해서 따라가 본 게 그 영화였다. 보자마자 마법처럼 나는 오타쿠가 되었다. 그 후 결말도 나오지 않은 책을 찾아 읽었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책이 실시간으로 나올 땐 먼저 읽은 친구들에게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으려 언제나 조심했다. 시리즈의 마지막을 마주했을 땐 이상한 감정과 마주해야 했다.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퇴사 한 번 없이 평생 다닌 회사를 나온 느낌. (물론 어떤 회사에도 그렇게 오래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긴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기분. 그래서 해리와 친구들에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때처럼 긴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
이젠 마음을 빼앗기는 시간이 별로 없다. 오히려 마음은 지키고 시간을 죽이는 때가 더 많아졌다. 두서없이 자극적인 숏폼을 보거나, 숏폼처럼 사건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영화를 보거나, 영화같이 충격적인 첫 장면으로 시작하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인다. 감동은 비어있고 자극만 남아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게 언제였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울컥했던 책은 출간일을 보니 2019년에 나온 책이었다. 그리고 수 만개의 숏폼은 휘발되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종종 어떤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어릴 때처럼 오랫동안 그리고 깊게 사랑하지 못한다. 시간과 기회가 있었을 때 더 마음을 내어줄걸. 내 마음을 빼앗아가게 그냥 가만히 놔둘걸. 사람의 마음이란 건 빼앗기기 위해 존재하기에, 그렇지 못한 나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늦은 밤에 차를 마신다. 카페인이 없는 루이보스 차 한 잔을 우렸다. 오후 4시가 지나면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는 피한다. 별일이 없었던 하루였다. 오늘도 큰 걱정거리 없이 잠자리에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