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쯤이었을까요? 폭설이 내린 늦겨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마지막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은 중학교에 갔습니다. 폭설이 내리기 일주일 전 입학식이 있었지요. 한 달 전에는 반 배정을 위한 시험도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중학교의 기억은 어렴풋이만 남아있는 것이겠지요. 6학년 같은 반 친구 중 저만 중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서류상 입학은 했으나 교복이 없어서 학교에 나가지 않았어요. 엄마 미미 씨는 제가 중학교에 가지 않으니 비싼 교복값을 아낄 수 있다며 좋아했지요. 1년 전, 누이 선선의 고등학교 교복을 구하기도 빠듯했었거든요. 눈이 무릎까지 내렸던 2004년 늦겨울을 잊지 못합니다. 모든 친구가 새 학교에 갔을 때, 저는 집에서 홀로 해리 포터를 돌려보고 있었던 그 시절을요. 그때 우리 가족은 한국을 떠나 태국으로 이민 갈 예정이었거든요.
안개 같은 자욱함 속에 있는 기억으로 2004년 4월에 아빠 철철 씨, 선선 그리고 저만 먼저 태국으로 떠났습니다. 미미 씨는 남아있던 집과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오기로 했었죠. 철철은 제일 먼저 우리가 살 집을 구한 후, 선선과 저를 학교에 입학시켰어요. 당시 한국인 이민 가정은 자식을 근처 국제학교에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태국어보다 영어를 더 친숙해했고, 부모 욕심에 자식에게 영어만 쓰는 학교를 보내고 싶으셨겠죠. 우리가 다니던 학교 이름은 ‘정원국제학교, 라용점’이었습니다.
처음 학교에 간 건 4월 마지막 주 월요일이었습니다. 봉고차처럼 생긴 스쿨버스가 선선과 저를 픽업하러 왔고 우리는 아빠 없이 첫 등교를 했습니다. 학교 리셉션에 도착해서 교복을 받아 환복하고 행정 직원의 안내에 따라 배정받은 반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입었던 교복은 네이비 반바지에 흰색 폴로티였습니다. 태국의 더운 날씨를 생각한 교장선생님의 탁월한 선택이였지요. 배정받은 반으로 향하는 길에 선선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기댈 곳이라곤 혈육밖에 없었는데. 중학생이 되었으니 이젠 홀로서기를 해야 할 차례였습니다.
도착한 반은 조금 수상했습니다. 분명 제가 받은 중학교 교복은 바지가 네이비였는데, 교실에 있는 친구들은 모두 초록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지요. 그들은 제 눈에 조금 어리숙해 보였습니다. 교복이 다르다는 것과 상관없이 친구들과 선생님은 모두 저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학생 중에는 한국인 친구가 한 명 있어 선생님은 저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같은 나라 사람이니 많이 챙겨주라고요. 저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국인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나만 네이비 바지를 입고 있는 거야?”
“그러게. 그건 중학생들이 입는 바지인데.”
“혹시 너 몇 학년이니?”
“우리 6학년이지.”
동공이 흔들렸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왔는데 다시 초등학생이 되다니. 분명 철철 씨가 입학 상담을 받을 때 국제학교에서 중학교 1학년과 맞먹는 7학년에 넣어주기로 했는데…. 소름이 척추를 따라 내려갔고, 팔에는 닭살이 돋았습니다. 저는 손을 들어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헬로, 티쳐. 메이. 아이. 유즈. 더. 배스룸?”
저는 급하게 화장실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회사에 있을 철철 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철철 씨는 회사 업무 때문에 바쁜 모양이었습니다. 자신은 지금 도와줄 수 없으니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전화 통화는 철철 씨를 원망한 순간 베스트 탑 10 중 하나로 꼽습니다. 저는 불안한 마음을 갖고 다시 교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7학년으로 갈 수 있을까. 선생님의 수업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쉬는 시간에 쭈뼛쭈뼛 선생님 책상 앞으로 갔습니다.
“재민! 무슨 일이니? 문제라도 있니?”
그리고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Teacher. I am not Year 6. I am Year 7.”
금발 머리의 파란색 눈을 가진 백인 선생님은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제가 교실에 들어올 때 선생님 눈에도 네이비 반바지가 눈에 띄었겠지요. 이건 문제 따위도 아니라는 듯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거 정말 재밌는 일이구나.”
대개 어린 시절 큰 사건은 아무렇지 않게 끝나듯, 이 사건도 그랬습니다. 선생님이 행정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반에 있는 한국인 친구가 고맙게도 통역을 해주었고요. 알고 보니 행정 직원이 다른 학생인 줄 착각하고 저를 6학년으로 데려갔던 것입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행정 직원은 저를 찾아와 미안하다며 7학년이 있는 교실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곳의 아이들은 모두 흰 폴로티에 네이비 반바지를 입고 있었지요. 그들은 어리숙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죠.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초록색 반바지를 입은 학생도 한 명 보였습니다. 행정 직원을 째려보며 어떻게 저 친구와 나를 헷갈릴 수 있지? 우리는 너무 다르게 생겼잖아.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그걸 영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속으로만 말했지요.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네요.
얼마 전 마트에 들러 집에 가는 길에 노란색 봉고차를 보았습니다. 차 옆에는 ‘예비 중학생 모집’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근처 학원 차였습니다. 예비 중학생이라는 말이 이제는 어색한 나이가 되었네요. 봉고차에 적힌 ‘예비 중학생’이란 단어를 보니 묻어두었던 중학교 첫날이 떠올랐네요. 몸은 예전의 감각을 기억하듯 소름이 살짝 돋았습니다.
봉고차에서 내리는 중학생 아이들을 보며 내가 저 때 다른 친구들처럼 중학교 입학식을 하고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아무래도 그 생각은 쓸데없을 것 같아 멈추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