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 말을 잃어가는 과정
한편, 설계사 직원들이 직면하고 있을 어려움이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재개발 사업지에는 가장 강력한 고도 제한이 걸려 있고, 조합원·일반분양·임대세대를 포함하는 수많은 세대를 배치하면서도 넓은 동간격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 설계 전반이 그렇듯, 특히 공동주택 배치는 굉장히 다양한 변수를 동시에 조정해야 한다.
인접 대지와 주변 동의 관계, 측벽과 채광을 위한 인동간격, 세대 수와 고도 제한까지. 고려해야 할 변수들은 단순히 많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다. 일견 복잡한 방정식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방정식과는 다르게 배치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수많은 변수들 가운데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는지는 결과로 남는다.
설계자는 이러한 서로 다른 요구들을 하나의 결과 안에 녹여내야 한다. 단순하게 보면, 재개발 사업은 ‘조합 – 시 혹은 지방자치단체 – 건설사’라는 삼각관계로 압축할 수 있다. 조합은 사업을 통해 조합원이 보유한 자산 가치를 높이고, 내 집을 마련하고자 한다. 건설사는 사업을 통해 최대한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 목표다. 지방자치단체는 무분별한 개발을 방지하고, 공공 기여를 최대한 확보하도록 사업을 견제하고 유도한다.
각자의 목표는 몇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다. 그럼에도 재개발 사업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유는, 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같은 조합 안에서도 평형, 지분, 개개인의 선호에 따라 의견은 쉽게 갈린다. 인허가의 주체인 시청과 구청 역시 안건에 따라 부서 간 의견이 상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 시공사는 또 다른 논리로 비용 절감을 요구한다. 이처럼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설계 변경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쉽고 간단한 사업이 어디 있겠느냐만, 재개발 사업은 유독 사공이 많고 의견 합일이 어려운 사업이다.
설계자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설계자는 사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서류 작업과 보고, 각종 심의 자료의 주체가 된다. 시청·구청에 제출하는 보고 자료는 물론이고, 공사계획도와 같은 시공사의 업무 역시 설계자의 도움이 없이는 작성되기 어렵다. 다양한 요식행위를 거치기 위해 설계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다.
옳은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한국의 건설 시장에서 설계자는 본래의 설계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역할까지 떠안고 있다. 예를 들어 물량 산출(Bill of Quantities)의 경우, 해외에서는 입찰자(시공자)나 발주자의 담당 업무에 가깝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설계사의 업무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시공의 주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설계 단계에서 내역서와 공사비 산출서를 제출한다. 보통은 적산·견적 사무실의 외주를 통해 처리하지만, 그 책임은 설계자에게 귀속된다.
설계자의 처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두더라도, 시어머니는 많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 프로젝트에서 설계자의 초기 의도가 온전히 드러나기 어렵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각 이해관계자는 프로젝트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서로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를 모두 수용하려다 보면 결과물은 대체로 무난하고 어디서 본 듯한 모습으로 수렴된다.
더욱이 ‘아파트 = 부동산 = 자산’이라는 공식이 공고한 사회에서는 새로운 건축적 시도보다는 이미 검증된 방식을 반복하는 쪽으로 사업이 흘러간다. 저렴하고 빠르게 많은 세대를 공급할 수 있는 방식이 우선된다. 도시 속에서 건물이 차지하는 방식이나, 사용자가 공간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고민하는 공동주택보다 익숙한 형태의 단지가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가 원인인지 결과인지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건축가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왔고 앞으로도 그 경향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건축 설계 분야는 어느 순간부터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건축 설계자가 감당해야 할 일은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럼에도 추가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영역들은 건축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 보다 독립적인 분야로 분화되었다. 설계자에게 요구되는 의무와 책임은 늘어났지만, 소비자나 사업자가 체감하는 이득은 설계 분야 내부에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기존 건축 설계 영역에 포함되어 있던 세부 분야들이 점점 깊은 전문성을 갖추며 독립적인 분야로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공간 컨설팅’, ‘홈스타일링’, ‘공간 브랜딩’, ‘부동산 기획’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 다수 등장했다. 동시에 대기업들은 내부에 브랜딩 팀을 두고 공간을 직접 다루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건설 사업에서 실제 사용자는 설계 과정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입주 이후의 ‘인테리어’ 영역으로 밀려난다. 많은 공간 컨설팅·브랜딩 업체들의 초기 포트폴리오가 인테리어에서 출발하는 이유다.
최근에는 이러한 분야들이 콘텐츠와 결합해 F&B 매장을 만들거나, 브랜드의 일부로 건물과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시간이 지나며 대기업 역시 내부 공간기획 팀을 구성해 고객 경험과 공간 경험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건축 설계 분야가 저가의 도면을 빠르게 공급하며 각종 심의와 규제, 건설 산업 내부의 견제에 대응하는 데에 몰두하는 사이, 사용자에게 직접적으로 와닿는 공간 경험과 브랜딩의 시장은 빠르게 독립해 성장해 왔다. 반면, 건설산업이 해오는 어원을 짐작하기도 어려운 단지 이름이나 휘황찬란한 홍보 문구로 으레 보아왔던 건물 이미지를 포장하려는 시도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공간을 여전히 ‘대규모 공급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계획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목표 시장과 수요자의 성향이 다른 두 영역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야 모두 ‘건축 설계가 다루어왔던 영역’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건축 설계는 오랫동안 건설 산업의 일부로서 ‘건물’ 자체에만 집중해 왔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최근 들어 대형 건축사사무소들이 공간 컨설팅이나 브랜딩을 다루는 자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정량적인 지표가 우선되는 건설 산업의 논리 바깥에, 사용자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닿는 분위기와 감각이라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잃어왔던 시장을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