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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Sep 29. 2022

"왜 열심히 살아?"에 대답하기

위로의 물리학 : 양자역학과 운명

1.

얼마 전 친구에게 느닷없이 이런 메시지가 왔습니다.

“너는 왜 열심히 살아? 그 끝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니.”


대체로 이런 질문은 궁금증이 아닙니다. 고민이고 상담이며, 내 말을 들어달라는 요청이죠. 더구나 이렇게 느닷없는 경우라면요. 이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무작정 학점을 위해 주변을 포기하고 살았는데 막상 졸업하니 무엇을 위해 그랬나 싶다던 동창, 대학에 오니 달라진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살았나 싶다던 과외생, 요즘 뭘 해도 자꾸만 늘어지고 동기 부여가 안 되며 목표 의식이 없다던 친구. 다들 시작은 ‘너는 인생 목표가 뭐야?’ ‘너는 허무할 때 없냐?’ 등의 질문이었죠.


2.

“너는 왜 열심히 살아?”


글쎄요, 일단 저는 그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끔 지인을 만나 ‘요즘 뭐 하고 지내?’한 질문을 들으면 생각나는 것들을 몇 개 열거하곤 합니다. 골프, 헬스, 노래, 책, 글쓰기, 사람 만나 술 먹기…...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겠다는 말을 몇 차례 듣긴 했지만(약속이 많긴 했습니다), 사실 저는 몸이 반쪽이 돼도 충분히 소화한 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많이 한 것처럼 보이는 건, 그냥 이름만 쭉 나열했기 때문입니다. 이름의 농도와 빈도는 생략한 채로요. 실제로는 일에만 열중했거나 하나의 취미에 몰두한 사람이 저보다 열심히 살았을 공산이 큽니다. 업로드용 사진을 많이 찍었다고 여행을 잘 다닌 것이 아니고 말이 없다고 해서 생각이 짧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요. 인스타 친구가 많다고 현실에서 우정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남을 볼 때 보이는 것만 봅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는 보이지 않는 속까지 보고요. 보통 진정한 성취와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밖에 보이는 것만을 쫓느라 의미를 상실해가는 삶을 살 필요도 없고, 남의 보이는 것과 내 속을 비교하느라 부러움과 박탈감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밖에 뿌릴 것을 찾느라 속에 쌓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 어린왕자, 생텍쥐페리

어린 학창 시절부터 제가 쭉 부러워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교우 관계, 학교 성적, 성격 등등 - 그 친구는 정말 상향된 밸런스를 갖춘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대학생이 되어 그 친구와 어쩌다 모임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게 된 일이 있었는데, 같이 새벽길을 걸어 돌아오다가 대뜸 저에게 그러는 겁니다.


“난 요즘 가장 부러운 사람이 너더라.”


그 놀랍고도 벅찬 동틀 녘의 감정을 아직 기억합니다. 내가 제일 부러워하던 사람이 나를 부러워한다니요. 그러고는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는데, 그런 건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별것도 아닌 내 특징을 이 친구가 되게 좋게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만 기억납니다. 그날은 제 보이는 부분이 그 친구에게 유달리 커 보였던 때였겠죠, 아마. 저는 과거 한참 동안을 그 친구의 보이는 부분만 보며 부러워했었고요.


그 친구는 기억할는지 모르겠지만 별거 아닌 그날의 말이 제 삶에는 어떠한 이정표로 남아있습니다. 남들이 내 바깥을 보고 날 높게 세워대도 으스댈 이유가 없고, 내가 아는 내 속이 부족해 보인다 하여도 남들에게 작아 보일까 봐 의기소침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헤르만 헤세의 말입니다.


3-1. 작가 : 이 부분은 긁어온 설명이니 안 읽으셔도 됩니다.


 [양자 역학]

양자(quantum)는 라틴어에서 나온 단어로 "얼마나 큰지" (how great or how much)라는 의미이며, 양자 역학에서 그것은 원자의 에너지와 같은 물리적 특성의 불연속 단위를 가리킨다. 양자 역학이 고전 물리학과 다른 특징적인 요소는 크게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양자화(quantization)로서 에너지, 운동량, 각운동량 등의 성질들이 특정 값들에 제한되어 있다. 둘째, 파동-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으로서 미시적인 현상에서는 파동의 특성과 입자의 특성이 동시에 관찰되는데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고 한다. 거시 세계에서는 파동 현상과 입자가 만들어내는 현상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 셋째,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로서, 물질의 어떤 특성들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


양자 역학에는 많은 논쟁이 있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코펜하겐 해석이다. 일반적으로 그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비판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 코펜하겐 해석은 한 가지 현상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간략하게 요약하기 어려운 양자 역학 전반적인 특성에 관한 것이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주로 주장한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양자 역학의 확률론적 특성은 언젠가 결정론적 이론으로 대체될 임시방편적인 것이 아니라, 이는 고전적인 의미의 인과율 폐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양자 역학의 형식론을 잘 정의하여 적용하더라도 다른 실험 상황에서 얻어지는 증거의 반대되는 특성으로 인해 항상 실험 장치에 관하여 언급해야 하며, 전자 스핀에 관한 실험은 대표적인 예이다. 양자 역학은 거시적인 - 일상생활 경험에 기초한 직관적인 예측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양자 역학 [quantum mechanics] (화학백과)]


20세기 양자역학의 발전은 불확정성과 우연, 확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고 기계적 숙명론은 ‘완성되지 않은 미래’라는 유연한 개념으로 대치되었다. 세계는 이제 신이 설계 해놓은 인과율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미시적인 관계들이 확률로 조합된 잠재성의 영역이 된 것이다. 세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원리가 없다는 생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치가 이동하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고 이런 변칙적 사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와 맞물려 세계사적 변동을 초래했다.


[출처 : 지붕없는 건축, 남상문 지음, 현암사]


3.


“끝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나?”


진리라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 정수와 의미에 대한 고찰과 독서를 꾸준히 하고 읽어보았으나, '그런 것은 없다'가 현재의 잠정적 결론입니다. 물론 매우 짧은 식견과 사고력으로 정리한 생각이라 결코 정답은 아니겠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양자 역학은 우리에게 운명이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관찰과 동시에 그 위치가 변한다는, 그리하여 정확한 위치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양자 역학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보고 있다고 믿는 현상들과 상충하는 원리가 세상을 구성한다고 합니다. 10만큼 에너지를 주면 10만큼 움직인 위치에 있고, 오차를 줄인 계산만 있다면 기계적인 인과율에 따라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는 생각 - 그것을 부정하죠. 한때는 궤도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던 전자의 위치가 이젠 해당 위치에 있을 ‘확률’만을 나타낼 수 있는 전자구름 분포 형태로 표현되고, 사물에 대한 관측과 예측은 이제 미시적인 관계들이 확률로 조합된 잠재성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며 양자 역학을 부정했지만, 애석하게도 신은 주사위 놀이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과거의 모든 사실을 모두 아는 신이라도, 현세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확률로서만 가능합니다.


불확정성의 원리. 운명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는, 불안정이 기본인 세계. 사실 우리는 이미 삶으로서 불확정성 원리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세워도 브라질 나비의 날갯짓에 제주도에 태풍이 생기면 말짱 친 것이 여행이고, 자아실현과 삶의 목적을 담아 그려온 장래 희망은 별것도 아닌 사건으로 수년간의 노력이 뒤틀리기도 합니다. 저 멀리 앞산만 보고 쭉 뻗은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굽이진 길을 걸어왔고, 정신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처음 오고자 했던 그 산도 아니고, 뭐 삶이 그렇습니다. 명징한 것은 삶은 원래 불안정하단 것뿐입니다. 과거에서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삶의 불안정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이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의미도 목적도 없는 삶, 예측할 수 없는 막연함에 공허해지며 매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흘리고, 계획 없이 몸 편한 대로만 사는 허무주의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그와 반대로 신의 섭리로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인생이기에 내 손으로 직접 일궈낼 수 있는 찬란에 감사하며, 매 순간 안에 나만의 의미를 담아 쌓아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같은 사실을 만나도 어떤 태도로 귀결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저는 가능한 후자를 택해가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삶과 인생은 거대한 운명과 계획에 종속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선분처럼 한 계절/ 하루 / 한 시간 - 매 순간의 점이 모여서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점을 모아 내 거대한 계획, 종단에 어떤 마무리가 나올 것인지, 이 그림의 의미가 무엇일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아요. 원래 그런 '의미' 같은 건 없었고, 있더라도 신도 모르는데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의 점 하나하나를 아름답게 찍어나가는 행위이고, 삶은 그래서 그림이기보단 영화이며, 행복은 목적이기보다 과정이기에 - 그냥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이 요즘 매일의 목표입니다.

목표를 어떻게 설정해? 그게 뭔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사진출처> 유퀴즈 유튜브 방송 캡쳐

4.

그래서 저는 제 삶의 선분(선분인지 반직선 인지도 모릅니다.)의 끝에 무엇이 있을진 알 수 없지만, 선을 이루는 오늘, 이 시간, 이 순간의 점을 그래도 정성 들여 찍어보려 합니다. 양자 역학에 빗대어 말하면 이렇게 되겠네요 - 전체 결과가 어떻게 될 진 예측할 수 없지만, 주어진 양자 하나하나의 떨림에 정성을 다하자. 유재석 씨는 방송에서 인생의 목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큰 계획 없이 그날그날 맡겨진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해낸다고 말했죠. 미국 네이비실이었나요, ‘인생을 바꾸려면 당장 아침에 이불부터 개라’는 동기 부여식 명언도 있습니다. 말은 다르고 내포한 의미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그 궤를 비슷하게 가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너무 거대해 막연해 보이면 그날그날 작은 목표들을 세워 달성해 가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 하루만큼은 만족스러운 점을 찍어보는 거예요. 그리하면 그 점들이 모인 삶도 만족스러워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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