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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Nov 15. 2022

담배 맛집

제주도에서

즐겨 찾는 제주도의 한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하다가 꽤 참신한 리뷰를 발견했다.


‘바깥 소파가 담배 맛집이라는 말에 주저 없이 예약했습니다. 밤에 술 마시다 나가서 앉아 한 대 태우니 뼛속까지 이해가 되네요!'


<담배 맛집>이라, 담배를 태우지 않는 비흡연자로서 크게 두 가지 의문을 갖게 하는 용어다.


첫째, 한숨을 시각적으로 그린다는 쾌쾌한 흰 연기뿐인 담배에 향도 아닌 '맛'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

둘째, 불만 붙이면 똑같은 방식으로 소멸하는 공장식 기성품인 궐련에게 애당초 맛 차이를 줄 수 있는가 -


담배 맛집. 흡연은 안 하고 술만 즐기는 나인지라 ‘위스키 맛집’ 쯤 되는 표현으로 이해해보기로 했다.



잘 나간다는 바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위스키보단 칵테일을 주문하게 된다. 위스키는 집에서 마시나 바에서 마시나 잔에 따라 놓으면 똑같은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다. 칵테일은 바텐더의 실력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최소한 바텐더의 노동력에 대해서만큼은)하는 느낌인데 반해, 위스키를 바에서 주문하면 괜히 같은 물건을 비싸게 주고 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술 마시러 가놓고 본전 생각하고 있으니 모양새가 빠지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뱃심에 비해 지갑이 얇은 것을.


그래서 나는 첫 잔으로 보통 30도 내외의 칵테일을 주문한다. 흥미로운 시그니처 메뉴가 있으면 그걸 시키기도 하고, 사이드카, 페니실린, 갓파더 정도에서 고르기도 한다. 어딜 가나 있는 클래식 메뉴라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

바 참, 서촌


칵테일은 재료를 섞어 다채롭고 조화로운 맛을 뽑아낸다. 잘 만든 칵테일은 비싼 위스키 부럽지 않게 맛도 뛰어나고, 비주얼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향’에 있어서 만큼은 긴 여운의 몰트 위스키를 따라오지 못한다. 칵테일은 태생 자체가 향이 짙기 어렵고, 마신 후에 피니쉬도 대체적으로 짧은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항상 칵테일을 다 마시고 나면 뭔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했던가, 칵테일로 시작하더라도 그다음 잔은 여지없이 묵직한 위스키를 고르게 된다. 첫째 잔은 칵테일, 둘째 잔은 몰트 위스키. 바를 갈 때 내 주문의 루틴은 이렇다.


그렇게 바에서 몇 차례 잔술로 위스키를 마셔 보니 알게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똑같은 위스키인데도 불구하고 집에서 마시는 것과 맛 차이가 꽤나 난다는 걸. 보관이 까다롭다는 내추럴 와인도 아니고, 햇빛과 열만 받지 않으면 어느 창고에 던져 놓아도 상관없는 위스키인데,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같은 술을, 비슷한 잔에 따라, 나 혼자 마시는 건데 왜 바에서 마실 때 훨씬 더 풍부한 감각이 다가오는 건지. 700미리 보틀 가격과 비교하며 비싸단 생각을 하면서 시키더라도, 바 테이블에 앉아 위스키 향을 맡고 입천장을 적시고 있으면 항상 쓴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으로 귀결됐다.



음식이란 것이 원래 그렇지만 특히 위스키와 같은 술, 기호 식품은 상황이 그 맛을 많이 좌우하는 것 같다. 그날의 온도, 햇살, 습기, 바람, 함께하는 사람, 몸에 쌓인 피로도 등등. 퇴근 후 시원한 맥주 한 캔의 맛은 퇴근이 있었기에, 여행지의 와인은 삶의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기에 그 맛이 나는 것일 테다.


혼자 유럽을 다닐 때, 진미를 먹으며 식당에 앉아있을 때의 심경을 지인에게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빌딩 58층쯤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 그랑 크뤼 와인과 샤또 브리앙을 먹으며 ‘아, 외롭다’를 뱉는 드라마 속 졸부의 마음에 잠깐 빙의된 기분이라고. 타지에서 외로움에 절여진 혀도 제 기분이 안 내키니 도무지 맛을 즐기려 들지  않았다.


위스키는 자신의 기분, 그리고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놀라운  차이를 보인다. 집에서 혼자 마실  밋밋하게 달달하던 발베니가 친구들과 낡은 돼지갈비 집에서 맥주잔에 따라 마실   그렇게 맛나던지. 혼자 바에서 마신 위스키의  차이도 아마 상황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스템 잔의 차이? 맛만 따진다면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다만 고독을 아름답게 밀어주는 분위기와, 적막이 어색할 즈음 말동무가 되어주는 바텐더의 존재가 위스키를 한층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줬을 뿐이다. 변화를 만든  위스키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가짐을 포함한, 위스키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다.



담배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아마 ‘담배 맛집’의 뜻은, 진짜 담배의 ‘맛’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에 대한 호평이었을 것이다. 소파의 촉감, 바라보는 정경, 그날의 분위기, 만나 함께 한 사람들 등등. 그 게스트하우스는 조용하고 싶으면 한없이 조용하기 좋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짧게든 길게든 나누기 좋은 공간이다. 사장님과 스텝은 어떠한 식사 자리도, 어떤 모임도 주선하지 않는다. 투숙객용 도미토리 룸이 몇 개 있고 거실에는 공용 소파와 여섯 의자가 들어가는 탁자 하나가 있을 뿐이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나 책을 보기도 하고, 큰 탁자에 홀로 앉아 맥주를 먹고 있으면 하나 둘 투숙객이 모여들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소란도, 고독도 자연스럽다. 엄청난 세련됨도, 대단한 아늑함이나 정갈함이 있는 것도 아닌 그곳이 나는 꾸준히 좋았다.


그 게하는 제주 공항 근처에 위치해서 제주도에 막 도착한 날이나 떠나기 전날 종종 머물곤 했다. 언제는 소파에 누워 혼자 책을 읽었고, 언제는 열댓 명이 거품 부풀 듯 거실에 모여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다. 최근에 갔을 때는 늦은 저녁거리를 사 온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조건 없이 나눠 먹기도 했다.


오래 훈연한 삼겹살에 기름이 빠진 듯, 억지스러운 맛이 쏙 빠져 담백한 공기가 참 좋은 장소다. 나는 담배를 안 태워 맛집 리뷰의 진위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여하간 뭘 해도 맛스러운 곳임이 틀림없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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