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 중반부터 믿기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금요일엔 최고 기온 영상 14도. 이게 신정과 구정 사이 날씨라니, 한 달 전 꽁꽁 싸매도 춥다며 앗츠츠- 를 달고 살았던 호들갑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하니 아들 쪽 날씨는 어떤지 물으신다. 어우, 여긴 날씨 많이 풀렸습니다, 하다가 문득 덧붙일 말이 생각나 상장받은 초등학생처럼 자랑스레 말했다.
"아부지, 여긴 얼마나 따뜻한지 이제 비가 옵니다, 비가."
물론 따뜻한 해안 도시 여수에 사시는 아버지는 여긴 반팔 입고 다닌다-! 며 너스레를 떠셨지만. 동생이 얼마 전에 생신 선물로 패딩을 사다 보냈는데 여수는 이제 필요 없다며 반품하라 하셨단다.
우리나라 사람들 비 앞에 단어 붙이는 걸 좋아한다. 여우비, 장대비, 이슬비...... 계절 뒤에는 꼭 '비'를 붙인다. 그 조합은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다. 생명의 봄비, 시원한 여름비, 추적한 가을비, 그리고 지금, 겨울비.
겨울비를 생각하면 차갑고 쓸쓸한 애상을 떠올린다. 겨울, 그리고 비 - 쌀쌀하고 흐느끼는 단어의 만남이라 어쩌면 당연지사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대중이 겨울비에 갖고 있는 감상을 잘 표현한다. 검정 중절모와 수트를 입고 하늘에서 와르르 떨어지는 차가운 무표정의 사내들. 초현실주의라 했지만 그림의 제목은 '겨울비(Golconde)'. 이쯤 되면 사실주의라고 해도 되지 않을는지.
그러나 생각해 보면 겨울비는 억울하다. 추운 겨울에 눈 녹아 대신 내린 비는 오히려 따스함의 상징이지 않나. 매일같이 토너 로션을 발라도 건조한 칼바람에 푸석해졌던 얼굴에, 공손히 내려앉는 촉촉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내의에 패딩을 끼어 입다 오래간만에 스웨터에 코트를 걸쳐보고, 눈 오면 미끌거릴까 넣어두던 구두도 오랜만에 꺼내 신는다. 가죽에 물 튈까, 장마철에 하던 걱정도 덜하다. 겨울비는 물웅덩이에 낙하할 때조차 조심스러운 파문이니까.
겨울비는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다. 추적거리는 소리도 없이 보드랍게, 연잎에 모찌만한 물방울 대신 솜털에 사뿐히 내려앉는 알갱이로 세상을 덮는다. 집안에선 창문을 열어봐도 확신할 수가 없어 문을 나서 대지를 밟고서야 공기의 촉감으로 안다. 이야, 오늘 비가 오는구나.
결혼한 친구 집들이 날에도 비가 내린다. 내린다기엔 입자가 잘아 공기에 떠다닌다는 게 맞겠다. 그만큼 차분한 코트를 꺼내 입고, 오늘은 초대됨 손님이니 청바지 대신 잘빠진 치노 팬츠에 로퍼를 신어 본다. 노래와 문학에서 어둑하고 음침하다고 그려지던 겨울비, 우리는 이제 알지 않나! 겨울비는 외양과 달리 따스한 습기를 들고 다니는 녀석이란 걸.
나는 오늘 비가 와서 더 좋다. 그러니 겨울철, 좋은 사람들과 모이는 날 하필 비가 온다고 속상해하지 말아 볼까 -
있던 날들 중 유난히도 따스하고 촉촉했던, 참 좋은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