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장 Oct 20. 2022

제주에 내리면

용담 해안에서

서문 시장을 들러 피순대를 1인분 샀습니다.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우고 바닷가를 산책하려 했는데, 가게에 자리가 없더라고요. 되려 잘 됐습니다. 길을 걷다 보이는 동네 마트에서 맥주를 하나 사 바닷가 콘크리트 위에서 같이 먹으렵니다.





제주 시내에서는 '용담'이라는 동네를 참 좋아합니다. 낡은 중국 드라마를 찍었을 것만 같은 용연 계곡을 따라 걸으면 제주를 이륙하는 비행기가 낮게 나는 바다에 도착합니다. 탄성 좋은 장대만 있다면 높게 뛰어 잡을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굳이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바다에 가까워지고 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앙증맞게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귀가 안 좋은 분이더라도 공기에 용해되어 실려오는 소금기가 점차 짙어지는 걸 알게 됩니다. '짠내'라는 말이 일상에서 애처로움으로 번역되는 게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짠내가 좋아요. 짠내 나는 동네도 좋습니다. 살짝이라도 코에 짠내가 스치면 어떠한 의식처럼 꼭 심호흡을 합니다. 내뱉을 때보다 들이킬 때가 기분이 더 좋습니다.





참을성이 없어 맥주를 따버리고 삼분의 일을 마셔버리며 걸어왔습니다. 신 맥주를 좋아하진 않는데 오늘은 마음에 듭니다. 피순대가 기름질 테니까요. 바닷가에 도착하니 곰팡지게 송송 뚫린 현무 바위 무더기 위로 편평한 구조물이 있습니다. 포장해온 피순대를 꺼내서 한입 뭅니다. 배가 고팠던지 피가 도는 느낌입니다.






밖에 스피커를 내놓은 식당이 뒤에서 노래를 틀어줍니다. 검정치마나 잔나비쯤 나왔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혁오 밴드가 나옵니다. 이것도 좋습니다. 아침 바람이었다면 오아시스의 노래도 좋았겠지만, 가을 석양이니 잔나비가 어울립니다. 여기는 물 귀한 사막이 아니라 짠내 나는 바다이기도 하니까요. 혁오가 끝나자 잔나비의 '가을밤에 든 생각' 기타 전주가 흘러줍니다.






하늘은 과장 없이 따뜻한 분보라 라벤더 색입니다. 먹지에 물기를 잔뜩 머금고 그린 수채화 같습니다. 색깔에 냄새가 있다면 누구나 좋아할 섬유유연제 향일 것입니다. 강수지 씨는 이런 하늘을 바라보며 보랏빛 향기를 불렀을까요? 이날 용담 해안가 하늘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본 모네의 그림을 많이도 닮아있었습니다. 나이가 든 모네는 지베르니에 위치한 집과 정원에서 이지러진 엷은 수련 꽃잎과 결 따라 일렁이는 수면을 흩트리게 그렸습니다. 그가 추사처럼 말년을 제주도에서 보냈다면 아마 정원의 수련 대신 바다의 하늘을 그렸을 겁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언제 이렇게들 왔는지 가족, 연인 할 것 없이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사진이 이 순간을 못 담아낸다는 걸 알아도 매번 이렇게 또 속아줘야 하는,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찰칵하고 찍어보아야 눈에 잔뜩 담아가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알게 됩니다. 다들 한두 번 사진을 찍어보고서 깨달은 듯 휴대폰 쥔 손을 허리춤까지 내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빛을 봅니다. 나는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군상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일어나 걸으려는데 최유리 씨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길을 지나가다가도 첫 소절이 들리면 꼭 뒤를 돌아봐야 할 것만 같은 끌림이 있습니다. 뒤를 보아 붙잡지 않으면 다 흩어져 영영 못 들을 것을 걱정하는  모양처럼요. 부드럽지만 강단 있고, 촉촉하지만 진합니다. 아나운서처럼 정직하지만 해금처럼 간드러지고, 아침 서리처럼 시원하지만 볕받이 단풍처럼 따스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한번쯤 들어보시란 뜻입니다.






북카페가 7시에 문을 닫는다 하니 더 늦기 전에 가야겠습니다.



짜이를 파는 곳입니다.

인도식 밀크티인데, 부드럽고, 진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비는 억울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