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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Dec 23. 2022

무가치한 장인 정신

대중성과 예술성에 대하여


잠실 호수의 '러버덕'이 그 시초였나, 밖에 귀엽고 거대한 무언가를 세워두면 사람들이 말 그대로 구름 떼처럼 몰린다. 이제 겨울이라 거리거리마다 검정 패딩을 입은 사람 천지니 개미 떼가 더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아트박스에 있는 캐릭터들처럼 눈은 검정 동그라미, 생김새는 멍청하고 못나게 귀여워 보일수록 인기가 좋다.


예전에 롯데월드몰 앞 15m 크기 핑크색 인형 '벨리곰' 전시에 2주 만에 2백만 명 넘게 구경 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한강 공원에 로댕 조각상을 가져왔어도 그 정도로 빠르게 관심을 모으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획자와 롯데 홍보팀 관계자들은 보너스도 받고 예상치를 뛰어넘는 좋은 실적에 환호성을 질렀을 테다. 하지만 내가 예술 조형과 전시를 전공으로 혼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 이름을 알리는 게 꿈인 조형가였다면?


귀엽긴 하다


인스타의 글쓰기 플랫폼으로서 한계를 느끼고 어디에 글을 올릴지 결정할 때 대중적인 블로그가 아니라 굳이 브런치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말하면서도 웃기지만, 혼자만의 예술적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공자도 아니거니와 내가 무슨 영향력 있고 인정받은 작가도 아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블로그처럼 문장 두세 줄 적고 큼지막한 사진을 넣어 문단을 끊어버리는 글을 적는 게 아니었다. 내 나름의 생각과 고찰, 일상을 대하는 태도와 지식을 정리하고 전하는 글을 적고 싶었다. 적절한 호흡과 적절한 길이로, 모자라지 않은 설명과 필요하다면 TMI 도 적어야 하는.


그러나 브런치에 글을 올리며 느낀 것은, 여기에서조차 인기글 순위에 있는 글들은 길어야 3-5분이면 읽는, 두 문장마다 문단을 띄어버린 문어체 넋두리 혹은 블로그식 체험 수기 글이란 것이다. 왜 웹툰 플랫폼이 아니라 브런치에 올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그림일기를 올린 게시물도 있었다. 그런 짧은 거인들 사이에서 길면 편 당 15분이 넘어가기도 하는 내 글을 고르고, 사진 첨부도 거의 없이 러시아 소설처럼 호들갑 떠는 지루한 문장 모음을 끝까지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줄간격을 띄워내지 않은 문단은 또 너무 길어, 모바일 디스플레이를 빽빽이 채우고도 한 화면에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제발 문단 좀 더 자주 나눠라.”


자주 글 피드백을 청하는 친구에게 발행된 글을 보낼 때마다 듣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건 분명 한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흐름이다’ 며 나도 좀체 고집을 꺾지 않았지만, 정작 나조차도 막상 모바일로 보면 화면이 작고 세로로 긴 탓에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편히 읽히지 않는다. 그걸 체감한 이후로는 조금씩 문단을 더 짧게 끊어보려 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사실 문단을 내 기준에 따라 올바르게 나누려고 하는 고민, 또 내가 초고보다 퇴고에 시간을 월등히 많이 쏟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퇴고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몇 번을 다시 읽고서 한다는 것이 고작 단어 몇 개, 문단 위치 조금 바꾸기 정도일 때가 대부분이고,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거 좀 바꾼다고 조회수 차이도 전혀 없을 것이다. 분명 나도 투자한 시간만큼 효용이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적당히 써서 올려도 아무 문제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매번 이러고 있다.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괴리와 고민은 다양한 분야에서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영화계에서 아카데미 시상식과 칸 영화제의 차이는 유명한 실례이고(‘기생충’의 동시 수상이 그래서 의미가 깊다), 재즈 연주를 갈고닦으려다 생활고로 포기하고 밴드의 적당한 세션으로 합류해 성공한 재즈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는 영화 ‘라라랜드’에 잘 나와있다. 전설적인 드러머 버디 리치는 "실력이 없으면 록 밴드에서 연주하다 끝나겠지(If you don’t have ability, you wind up playing in a rock band)."라는 말을 남겼지만, 록 밴드와 재즈 밴드의 성공 가능성과 기대 수입을 비교하자면 압도적으로 록밴드가 높다. 예술적으로 혹은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던, 대중은 이를 유명세와 수입으로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버디 리치는 재즈 드러머였고, 록과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는 록에 어떤 억하심정도 없습니다 - 작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열정에 끌리게 되어 있어. 자신이 잊었던 걸 상기시켜주니까." 미아(엠마 스톤)의 말과 달리 대중들은 열정의 가치를 알아 주지 않았다. (출처:라라랜드)


인터넷-모바일 시장이 실물 시장보다 더 커진 현대에 들어서 예술은 교양과 표현의 수단보다 유희거리로서 소비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희거리로서 소비되기 용이한 예술이 돈이 된다. 골치 아픈 순수문학보다는 시원한 웹소설을 읽고, 미술관을 가기보다 팝아트나 웹툰을 소비한다. 대중들의 관심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그러한 창작물엔 광고가 붙고 재창조되며, 또 다른 비슷한 유희거리가 생산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노인과 바다>보다는 <재벌집 막내아들>이 만들어지기 좋은 시대다.


재밌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가벼워졌다고 생각된 분야에서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는 한탄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수년 전부터 네이버 웹툰 플랫폼에 정식 연재되기 시작한 일부 ‘병맛 만화’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채색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그림판으로 대강 그린 만화에 아무 개연성 없는 스토리- 작품성과 실력에 대한 논란과 별점 테러와는 별개로 이러한 만화들은 화제가 되었고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정식으로 연재를 하기 위해 곰팡이 핀 골방에서 무던히도 노력하고 힘들게 버텼다는 기안 84의 만화가 지망생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 노력도 정성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수준 미달의 콘텐츠가 화제가 되고 먼저 등단하는 상황에 열불이 터질 만도 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기안 84 그마저도 ‘패션왕’-‘복학왕’에서 작품성 논란이 상당했지만.


가벼움이 대우받는 세상은 분업과 기계화를 통한 대량 생산, 그리고 소비 지상주의를 통해 일반 대중의 저렴한 소비 양식이 세계의 주류가 되면서 벌어진 현상이기도 하다. 가벼움은 쉽게 생산되어 대중들이 쉽게 소비하고, 그렇게 돈으로 환산된다. 예술성과 장인 정신은 현대에 들어 많은 소비로 이어지기 어려워 그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옷보다 중국 공장에서 만든 티셔츠가 압도적으로 많이 팔리고, 과거 교육받은 귀족들이나 즐겨 보고 소장하던 명화가 걸려있는 국립박물관보다 전시에 번쩍이는 불빛과 안개 효과를 동원하는 대림미술관에 사람이 몰린다. 돈 많은 지식인이나 읽을 수 있었던 서적은 만화, 웹소설, 블로그까지 다양한 형태의 글로써 대중들에게 소비가 된다. 외식과 카페는 더 이상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고, 음악은 이제 콘서트장을 갈 필요도, LP판을 살 필요도 없이 스트리밍으로 돈 한 푼 안 들이고 들을 수 있다. 애석하게도 대중음악을 비롯한 온라인 소비의 주체는 아직 생각의 고찰보단 감정의 배설을 선호하기 쉬운 10-20대이다. 거기에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경향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 세대를 걸쳐 더욱 짙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수준만 갖춘다면, 본질에 대한 ‘작품성’이란 것을 대중들이 알아주길 기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50점짜리 제품이 70점이 되기 위해서 살이 타는 노력이 필요하다면, 80점짜리 제품을 90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과 소비가 그만큼 상승하느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해당 분야의 마니아나 전문가 정도가 되면 분명 그 차이를 알아차리고 인정해줄 수도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저 비슷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본질로만 파고드는 생산은 이해도와 가격 접근성 측면에서 대중의 외면을 받기 쉽다. 오히려 타깃층으로 하는 대중의 니즈를 알아채고 딱 그에 걸맞은 수준의 제품을 양산하는 것 - 그것이 고전주의, 낭만주의,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닌, 이 시대의 ‘자본주의(Capitalism)’ 예술이 되었다.



'자본주의' 예술 - 그 또한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싸구려 후크송은 음악도 아니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더라도, 어디 그런 식으로라도 음원 차트 1위에 오르는 일이 과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나.


요즘 관광지에 가보면 불편하지만 예쁜 좌석과 인테리어를 갖춰 회전율 높은 대형 카페들이 아주 많다. 시원달달한 시그니처 메뉴 몇 개와 기본 커피 음료를 한 잔에 7-8천 원에 파는 그런 카페들. 카페의 본질인 커피의 질과 바리스타의 실력과는 별개로 손님은 바글바글하다. 하지만 커피의 ‘작품성’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대중 인기에 영합해 많은 돈을 벌고 있는 대형 카페를 만드는 일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자음 섞인 유행곡을 쉽게 뽑아내는 프로듀서, 자극적인 언행으로 인기를 끄는 유튜버, 과거 ‘귀여니’로  대표되었던 인터넷 소설, 백종원 씨의 더본코리아 요식업 등등, 누가 봐도 대중성에 좀 더 중점을 두어 성공한 사례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성공이 ‘예술성, 완성도, 작품성’이란 칼날로 함부로 재단하고 폄하할 수 있는 재질은 아니다. 이들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 대단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금전과 유명세를 부른 성공과 자본주의의 흐름 안에서 또 하나의 예술이다.


대중성과 예술성은 완전한 양극에 떨어져 있는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상호보완하는 성질이자 일부 구간에서 필요충분조건으로 겹치는 성질이기도 하다. 대중성이 없다면 작품이 아무리 뛰어난다고 한들 표현을 들어줄 이가 없으며, 최소한의 완성도가 갖춰지지 않을 경우 쉽게 모여들었던 대중은 그만큼이나 쉽게 싫증을 내며 와해되거나 낮은 수준을 지적하며 성공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사실 어느 방향이든 끝장을 봐버리면 일맥상통한다는 생각도 든다. 대중성으로 끝장을 봐버리면 이미 예술이고, 예술성이 극에 달하면 많은 대중들의 심금을 건드린다. BTS는 이미 예술가고, 피카소는 대중적인 화가인 것처럼.



허나 내 글은 그 사이, 아직 이도저도 아닌 곳에서 노선을 정하고 둘 중 하나의 토끼 잡기도 버거워 고군분투하는 초심자, 생산자로서 대중의 이야기이다. 작품성과 대중성, 100% 하나의 방향으로만 몰두하기는 쉽지 않으니 정도의 스펙트럼 안에서 제 노력과 방향성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돈으로 대표되는 대중성에 더 기울일지, 남들보다 자신이 알아주는 작품성에 더 매진할 것인지. 수준 높은 커피를 내리며 본질에 집중하는 개인 카페의 핸드드립 장인, 혹은 누가 만들어도 상관없는 음료 메뉴를 개발해 여러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해 돌리는 관광지 대형 카페의 사장님. 당신은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사람을 닮고 싶고 또 어떤 노력이 더 대단하다 느껴지는가.


사실 한 인간이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은 정해져 있다. 다만 사회 구조와 시선을 의식하는 마음이 이를 방해할 뿐이다. 몰두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구조, 비교를 통해 성공의 정도를 판단하는 사회, 타인의 존재에 얼마간 휘둘리는 개인의 합작품이다. 분명 행복에 관한 연구는 자신의 기준에 몰두하는 태도가 삶을 얼마나 충만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통용가능한 가치는 돈으로 수치화되어 우리를 자꾸 주변과 비교하게 만들고, 대중성을 놓칠 수 없게 만든다.


가볍고 번지르르한 B급이 대세가 되어버리는 요즘 세상이다. 그렇다면 A급, S급을 추구하는 행복의 칼날은 어떤 동기 부여의 숫돌에 벼려야 할지 - 점차 사회는 그 대답을 주지 않고 각 개인이 알아서 찾으라 말하고 있다. 원래 삶의 정수란 개인이 찾아야 하는 법이라 곤하지만,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고 적당함에 안주하는 게 이득이 된 사회가 아쉽기도 하다. 매일 새벽 시장에서 당일 재료를 사 와 숙성하는 횟집, 가격대를 높이더라도 두꺼운 온스의 치노 팬츠를 만들어내는 브랜드,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최적인 배치를 위해 세심한 고민을 한 흔적이 느껴지는 전시 - 내가 그런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가끔 공방 구석에서 한 세월 도자기를 빚고 조금 으스러졌다고 바닥에 내리치는 고집 센 노인이 되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중국에서 생산한 백자 그릇을 들여와 트렌디한 포장으로 엄청난 매출을 올리는 도자기 브랜드를 지켜보면서도 박탈감 없이 묵묵히 물레를 돌릴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이 내게 있을 런지는 -


글쎄, 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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