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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Dec 02. 2022

모기가 오르다

누런 벽에 모기가 한 마리 붙어있었다. 배만 붉그적적 시커먼 걸 보니 십분 전 내 왼 무릎을 문 놈이 분명하였다. 오른손으로 잽싸게 찰싹, 애석하게도 살짝 빗맞아 날개나 다리 하나 그 언저리쯤을 때린 것 같았다. 충격 때문인지 모기는 떨어져 벽과 침대 프레임 사이로 곤두박질쳤다. 몇 주째 먼지만 쌓여 진드기가 최상위 포식자일 법한, 나무와 돌의 경계가 되지 못한 틈 사이의 생태계로.


손을 씻고 돌아와 혹 죽었나 하고 살펴보니 바닥엔 모기가 없었다. 휴대폰으로 후레시를 켜고 보니 이 녀석 침대 프레임 하단면에 붙어있다. 세네 번 날갯짓을 해보지만 내 손날은 날개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방향감을 상실하여 1초도 채 못 되는 짧은 비행에 벽과 벽을 수 차례 부딪혔다. 모기의 날개는 추진기관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발성기관이 되었다. 웽웽.


모기는 포기와 순응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 없는 동물일까? 놀랍게도 그 녀석은, 벽을 타기 시작했다. 어설프지만 잽싼 몸놀림으로, 마치 처음 걸음마를 배운 지네처럼, 여섯 다리를 교차하며 오르기 시작했다. 위로 오르면 다시 피를 빨고 또 살 수 있다는 듯이.


믿기지 않은 높이까지 모기가 올라왔을 즈음, 나는 순간적으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모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 녀석은 철퍼덕 떨어져 먼지와 섞이더니, 아랑곳 않고 좌절한 티도 없이 이내 곧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시지프스를 떠올렸다.

그의 돌을 비탈로 불어 날릴 수 있는 신이 된 나는 그가 오르는 행위의 무의미를 생각한다.


카뮈는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의 자세에서 '반항'을 말한다 - 허무와 고통이 반복되는 삶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인간이 되자고. 신으로부터 무의미의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는, 돌을 끌어 오르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저항했다. 주저앉아 허무의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바라는 신의 소망을, 그는 즐거움으로 꺾어버렸다.


우리도 매한가지 아닌가. 어차피 끝이 없고 무목적인 삶을, 예정된 추락을 굴리며 살아간다. '이쯤이면 끝이겠지' 하며 올려놓아도 어느새 다시금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삶이다. 우리는 이유 없이 오르려 애쓴다. 매 겨울이 되면 어차피 떨궈질 이파리를 애써 틔워내는 나무처럼. 매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떨궈진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 올린다. 정해진 허무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주체적으로 순응해야 하는가 -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목적이 아닌 행위에서 행복의 투쟁을 쌓아가야 한다고.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모기는 부러진 날개에 절망하며 먼지와 엉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지옥을 희망으로 바꾸었단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그 순간에 할 것을 하는 자세와 최선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모기는 고통에 신음하며 날개 잃어 좌절한 심리를 끌고 별다른 도리 없어 벽을 올랐을까, 남아있는 다리 보폭 하나하나에 힘을 싣고 뱃거죽이 터지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활발한 숨을 몰아쉬었을까. 그가 카뮈의 모기였다면, 후자였을 것이다.


허리를 다쳐 온종일 누워 원치 않는 휴대폰을 뒤적이는 나는, 도대체 누가 삶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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