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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Nov 17. 2022

수능의 평범성에 대하여

시간은 등속으로 흐른다지만 새삼스럽게 뭉텅이 져 떨궈진 세월을 실감할 때가 있다. 마치 지구 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이라는 지속적이고 실존하는 지구 종말 현상에 방심하고 있다가, ‘남태평양 섬 하나가 아예 가라앉았다’는 뉴스를 접하는 순간 갑자기 해발고도가 30cm 낮아진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처럼. 1월 1일 자정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 생일 케이크에 꽂힌 영롱한 촛불을 부는 일, 삼일절 다음 날 새 학기의 등굣길 - 일반적으로 일 년의 퀀텀점프를 경험하게 하는 순간의 예로는 이런 것들이 있을 테다.


나에게는 수능 날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약속이라도 한 듯(실제로 약속을 하긴 했다) 각양각색의 사회 시스템이 잠시 멈추는 날. 비행기는 듣기 평가에 혹여 방해가 될까 봐 이착륙과 운행을 삼가고 고3 한 학년을 위해 나머지 초중고 학생들의 의무교육도 하루 중단된다. 또 어떤 회사는 출근 시간을 한 시간 늦춘다. 이러한 호들갑을 보며 나는 회한 없는 멍을 때린다. 이야, 올해가 이렇게 또 지나가는구나.


오늘은 교도소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상시로 틀어두는 TV 뉴스 채널에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은 수능 정보가 흘러나왔다. 큰 글씨가 화면 아래 주황 띠 위로 스쳐가며 수학 난이도가 어떻다느니, EBS 연계율이 50%라느니 하는 내용이 얼핏 지나갔다.




나도 입시에 관한 추억이 적다고 할 순 없다. 나름 고등학교 3년을 꼬박 다녔고, 또 괜찮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경험에 입각한 생각을 풀려면 겸손을 탑재해야 한다.


현역으로 훌렁 대학생이 되어버린 내 주변만 해도 재수, 반수, 삼수, 더 나아가 삼반수라는 혼종의 수험 생활까지 겪고 세상에 나온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보다 몇 걸음 더 해본 사람들은 있다. 입시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사실 학창 시절 내 주변만 해도 나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차고 넘쳤기 때문에 절실하고 고되었다는 미화된 푸념을 늘어놓을 자격도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전국 동나이대 국민 절반 이상이 공유하는 시절이니 매년 이맘쯤이 오거나 어쩌다 모임에서 입시 관련된 주제가 나오면 이야기꽃을 피운다. 나에겐 좋은 추억을 회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잘난 척 같긴 하지만, 솔직히 입시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희망하던 학교와 전공이 상당히 높은 점수를 요구하는 과였는데도 별 역경없이 붙었으니. 지금은 졸업을 하여 좀 덜하지만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이 새로 섞이는 자리에서 전공을 말하면 과분한 관심을 받곤 했다.


“우와, 진짜 공부 잘하셨겠네요? 전교 1등 해봤어요?” - 이게 가장 흔히 듣는 말이었다.


어쩌다 지식을 비치거나 문어체적인 표현으로 말을 한다 치면,

“와, 역시 똑똑한 사람은 달라.” - 이 같은 농담조 찬사를 듣기도 했다.




학벌은 어째서 사람들에게 지성으로 오인되어 입력된 것일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내가 ‘똑똑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 생략 가능한 사회 인식과 구조가 편할 때도 많았다. 내 주장은 괜히 더 신빙성이 있었고, 고민 상담을 해주면 상대는 더 귀 기울여 들었다. 말실수를 하면 인간미로 치부해주었고, 내가 변명 몇 마디를 붙이지 않아도 그러했다.


(‘대학을 잘 간 사람이 듣는 말’에 공감하지 못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매우 잘생긴 남자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라고 보면 되겠다 - 혹시, 여자에게 길에서 번호를 따이는 삶이 있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수능을 위시한 입시 결과를 개인의 포괄적인 지적 능력의 척도로 오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모두’의 경험이기 때문일 테다. 사람은 자기 경험 크기만큼의 구멍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그 시절엔 우리 모두가 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노력할 의지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놀고, 책을 펴놓고 졸기도 하고. 가끔은 정말 죽도록 했는데도 안 된 사람들도 있다. 도무지 내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다 맞출 수 없던 퍼즐, 그 퍼즐의 남은 조각은 분명 천부적인 지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해봤기 때문에 안다. 수능을 잘 보고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나도, 내 친구도, 내 주변 모두가 학창 시절 얻으려 했지만 얻지 못한 결과 - 그것을 달성한 사람을 향해 표하는 경의 비슷한 것. 그래서 그 사람은 '전반적으로'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 이미지가 된다.


즐겨보는 유튜브 코미디 쇼에서 서울대를 나왔다는 게스트에게 개그맨이 이렇게 핀잔주는 것을 보았다.


“He is from 서울대.”

“Wow, Really? Wooooow!”

“아, 그런데 서울대가 맞긴 한데, It’s not 학부. It’s 대학원.”

“What? Hey you know, In Korea, 대학원 is not your 학력. You know what I’m saying? It’s only 학부만 쳐줘, U know. It’s 냉정해!”

“Yes, In Korea? No 수능, No 리스펙”


MZ, X 비슷한 세대의 생각을 어느 정도 대변하는 유머가 아닐까?

U have to 수능 쳐야 돼~


안타깝고도 다행스럽게도, 입시가 지성을 대변하는 유효 기간은 수능이 끝나고 최대 몇 년 정도까지다. 그 이후론 사람들도 폭넓은 경험이 쌓이며 그렇지 않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된다. 과 동기들만 봐도 수능 성적과 학점이 얼마나 불일치하던가. 정시 우수생으로 들어온 학생이 학사 경고를 맞는 경우도 수두룩하며, 이와 반대로 대학에서부터 공부에 매진하여 유수한 해외 대학원에 들어간 사례도 봤다.


어른이 된 이후 책을 얼마나 심도 있게 읽느냐에 따라서 지혜와 지식은 천지차이가 난다. 일머리가 좋아 사업을 해 잘 사는 사람도 많고, 부모 잘 만나서 적당히 카페나 술집 차려 사는 사람도 많고, 하여간 주위를 둘러보면 수능과 관계없이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수능은 지적 능력의 척도가 되지 못하고, 성공이나 행복의 척도로써는 더더욱 그 기능을 못한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 몇 년만 지나면 대다수가 깨닫게 되는 진실이다. 수능이 끝나고 자만이나 비관이 들거든 그것을 반절로 네 번쯤 접어보자. 딱 그만큼의 감정만 기억하고, 그 면적의 십 분의 일 정도만 표출하며 사는 게 적당할 것 같다.


수험생들은 ‘수능 끝나면 할 일 목록’을 적어 책상 앞에 붙여두기도 하지만 대체로 지키진 못한다. 학력고사 세대부터 역사적으로 유수한 인생 선배님들조차 언제나 그랬다. 나의 경우엔 정말 지키지 말아야 할 것만 골라서 지켰다 - 예를 들어 빨간 머리로 염색하기랄지… 내일로를 다니며 부산을 처음으로 혼자 가보기도 하고 나름 속속들이 다녔지만 수능 끝난 고3이 진정으로 성취해야 할 No.1 업적은 따로 있다. 수능 끝난 저녁은 일단 무념하게 놀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면 당장 전화를 돌려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하는 걸 추천한다. 장롱 면허라도 이 시기에 따놓지 않으면 정말, 정말로 정작 나중에 필요할 때 후회할 지도 모른다.



면허 경력이 2년 미만인 걸 렌터카 인수일에 알아차린 제주 여행 첫째 날의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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