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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Jan 22. 2023

장발-짱

머리를 기른 지 좀 됐다. 반년 전쯤 독일과 파리로 3주 정도 여행을 가게 됐는데, 서양에서는 머리 긴 남자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다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출국 전날에 아이비리그-컷으로 짧게 쳐버렸다. 그게 아마 바리깡 사용의 마지막 기억인 듯하다.


그 이후론 이제 다시 머리를 길러볼까 - 작정하고 기르는 중이다. 고개를 숙여 진료를 볼 때면 앞머리가 자꾸 안경  밑을 내려와 성시경 씨 마냥 고개를 흔들어 빼내기도 한다. 연약한 뿌리가 자라나는 머리카락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자꾸만 쳐지기 때문에 마냥 놔두진 못한다. 그래도 뒷 꽁지머리가 나무젓가락으로 잡힐 정돈 되니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너 머리 기르냐?' 묻곤 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4 중순에는 보통 포마드나 아이비리그컷으로 짧은 머리를 했다.    정도는  달에  번씩 미용실에 들리며 기장을  짧은 스타일을 유지하고, 8에 들어서면 슬슬 기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11월쯤 되면 가르마펌을  기장이 된다. 거기서 취향에 맞춰 뒷머리를   기르면 세미-리프컷, 현재  머리 양이 완성. 지난 2-3   머리 사이클이다.


남자는 변화를 줄 구석이 많이 없어 머리가 인상을 많이 결정한다. 장발 직전부터 군인 머리 수준까지 오가는 넓은 진폭의 변화를 구사하다 보니 몇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지인들은 만날 때마다 머리에 대한 비평을 한두 마디씩 보탠다.


“어 머리 길었네, 느낌 좀 있다 야”

“야, 너는 확실히 짧게 친 게 잘 어울리네.”


듣다 보면 사람    명이 정말 자신의 말이 취향이 아니라 오차 없는 사회의 미적 정답이라  확신에 차서 말한다. '마음에 든다' 아니라 '그게  낫다'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내가 수백 사공의 말을 집계해 보면 정답 비슷한 경향성이란 것도 없다. 누구는 짧은  낫다 하고,  다른 이는   낫다 하고... 대강 오십  오십  되지 않을까.


그저 자기 취향을 말할 뿐이다. 평생을 중학생 남자아이 대하는 학생주임처럼 ‘남자는 무조건 짧은 머리 고수하시던 어머니도, 작년 어느    머리를 보시더니 분위기 있어 보여 좋다고 하신다. 어쩌면 사람은 자기 취향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따라서 타인의 의견을 열심히 수집한다고 해서 정답이 나올 리가 없다. 실패할 용기도 없이 추측 만으로 정답이 나오길 바라는 심리는 조금은 무기력하고 연약한 태도가 아닐런지. 머리는 어차피 자라난다! 그러니 무난하기만  왔다면 스타일의 변연을 넓혀가 보는  어떨까. 너무 파격적일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 확고한 세계에선 완전한 실패란 없으니까.


머리 자를까요-기를까요-라는 질문에 으레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별 고민 없이 해주시는 대답이 정답일 지도 모르겠다.


‘고객님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는 거죠!’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유럽에서 모델 활동을 잠깐 했다는 친구를 한 명 만났다. 그도 마침 장발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버무린 삶을 살아온 그가 중간에 제창한 재밌는 사회과학 이론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이름하여 '장발-민머리 공급 부족 이론'.


장발 혹은 민머리와 같은 극단적인 스타일은 평균적인 호감도는 낮을 수는 있으나 일부 마니아층에게 꾸준하고 높은 수요가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괜찮은 남자들  그런 스타일을 시도하는 비율은 극히 낮은 상황이다. 예를 들어 100의 여자  97명은 장발을 싫어하고 3명은 좋아하는데, 장발 남자는 1명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수요는 낮지만, 공급은 그보다도 훨씬 낮은.


그래서 무난한 헤어스타일에 무난한 옷차림으로 승부 봐서 특출 날 자신이 없는 남자라면, 장발이나 민머리를 시도해 보는 것이 제 짝을 찾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평범남 구제 컨설팅 제안이었다.


성수나 한남 쪽에 가면 장발-민머리에 문신 혹은 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많다. 가만 그들을 떠올려보니 화려하고 잘 꾸민 여성이 그 옆에서 함께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을 자주 봤었다. '일반적인' 시선의 여자들에게 저런 스타일 어때, 물어보면 질색을 하며 '남자는 깔끔한 게 최고야'라고 하지만, 어차피 장발과 민머리를 하는 것의 목표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미 승자다.


그냥 무작위였던 내 시각 경험의 확증편향일까, 아무튼 실례가 뒷받침까지 해주다 보니 웃긴 그의 이론이 꽤나 일리 있게 들렸다. 연애와 결혼은 호감도 조사 평균값 상위층이 되어 기회를 부여받는 게 아니라 단 한 명의 여인에게 슈퍼 패스 한 장을 받아내는 일. 만인의 사랑을 미움받을 용기로 치환하면 누군가는 내 마니아, 내 팬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주변에 좀체 여자를 사귀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한번 장발을 권해볼까 싶다 (민머리는 왠지 Irreversible 한 느낌이라). 평범한 방식으로 평범한 수요를 충족하려고 애쓰지 마라, 너는 특별한 여자를 만날 운명이었으니까 - 뭐, 이런 멘트로 그들의 지난 세월을 위로하며.


p.s

참고로 내가 머리를 기르는 건 위와 같은 이유가 아니다.


아무튼,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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