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기른 지 좀 됐다. 반년 전쯤 독일과 파리로 3주 정도 여행을 가게 됐는데, 서양에서는 머리 긴 남자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다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출국 전날에 아이비리그-컷으로 짧게 쳐버렸다. 그게 아마 바리깡 사용의 마지막 기억인 듯하다.
그 이후론 이제 다시 머리를 길러볼까 - 작정하고 기르는 중이다. 고개를 숙여 진료를 볼 때면 앞머리가 자꾸 안경 밑을 내려와 성시경 씨 마냥 고개를 흔들어 빼내기도 한다. 연약한 뿌리가 자라나는 머리카락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자꾸만 쳐지기 때문에 마냥 놔두진 못한다. 그래도 뒷 꽁지머리가 나무젓가락으로 잡힐 정돈 되니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너 머리 기르냐?' 묻곤 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4월 중순에는 보통 포마드나 아이비리그컷으로 짧은 머리를 했다. 한 넉 달 정도는 한 달에 한 번씩 미용실에 들리며 기장을 쳐 짧은 스타일을 유지하고, 8월에 들어서면 슬슬 기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11월쯤 되면 가르마펌을 할 기장이 된다. 거기서 취향에 맞춰 뒷머리를 좀 더 기르면 세미-리프컷, 현재 내 머리 모양이 완성. 지난 2-3년 간 내 머리 사이클이다.
남자는 변화를 줄 구석이 많이 없어 머리가 인상을 많이 결정한다. 장발 직전부터 군인 머리 수준까지 오가는 넓은 진폭의 변화를 구사하다 보니 몇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지인들은 만날 때마다 머리에 대한 비평을 한두 마디씩 보탠다.
“어 머리 길었네, 느낌 좀 있다 야”
“야, 너는 확실히 짧게 친 게 잘 어울리네.”
듣다 보면 사람 한 명 한 명이 정말 자신의 말이 취향이 아니라 오차 없는 사회의 미적 정답이라는 듯 확신에 차서 말한다. '마음에 든다'가 아니라 '그게 더 낫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내가 수백 사공의 말을 집계해 보면 정답 비슷한 경향성이란 것도 없다. 누구는 짧은 게 낫다 하고, 또 다른 이는 긴 게 낫다 하고... 대강 오십 대 오십 쯤 되지 않을까.
그저 자기 취향을 말할 뿐이다. 평생을 중학생 남자아이 대하는 학생주임처럼 ‘남자는 무조건 짧은 머리’를 고수하시던 어머니도, 작년 어느 날 내 긴 머리를 보시더니 분위기 있어 보여 좋다고 하신다. 어쩌면 사람은 자기 취향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따라서 타인의 의견을 열심히 수집한다고 해서 정답이 나올 리가 없다. 실패할 용기도 없이 추측 만으로 정답이 나오길 바라는 심리는 조금은 무기력하고 연약한 태도가 아닐런지. 머리는 어차피 자라난다! 그러니 무난하기만 해 왔다면 스타일의 변연을 넓혀가 보는 건 어떨까. 너무 파격적일까 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 확고한 세계에선 완전한 실패란 없으니까.
머리 자를까요-기를까요-라는 질문에 으레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별 고민 없이 해주시는 대답이 정답일 지도 모르겠다.
‘고객님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는 거죠!’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유럽에서 모델 활동을 잠깐 했다는 친구를 한 명 만났다. 그도 마침 장발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버무린 삶을 살아온 그가 중간에 제창한 재밌는 사회과학 이론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이름하여 '장발-민머리 공급 부족 이론'.
장발 혹은 민머리와 같은 극단적인 스타일은 평균적인 호감도는 낮을 수는 있으나 일부 마니아층에게 꾸준하고 높은 수요가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괜찮은 남자들 중 그런 스타일을 시도하는 비율은 극히 낮은 상황이다. 예를 들어 100명의 여자 중 97명은 장발을 싫어하고 3명은 좋아하는데, 장발 남자는 1명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수요는 낮지만, 공급은 그보다도 훨씬 낮은.
그래서 무난한 헤어스타일에 무난한 옷차림으로 승부 봐서 특출 날 자신이 없는 남자라면, 장발이나 민머리를 시도해 보는 것이 제 짝을 찾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평범남 구제 컨설팅 제안이었다.
성수나 한남 쪽에 가면 장발-민머리에 문신 혹은 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많다. 가만 그들을 떠올려보니 화려하고 잘 꾸민 여성이 그 옆에서 함께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을 자주 봤었다. '일반적인' 시선의 여자들에게 저런 스타일 어때, 물어보면 질색을 하며 '남자는 깔끔한 게 최고야'라고 하지만, 어차피 장발과 민머리를 하는 것의 목표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미 승자다.
그냥 무작위였던 내 시각 경험의 확증편향일까, 아무튼 실례가 뒷받침까지 해주다 보니 웃긴 그의 이론이 꽤나 일리 있게 들렸다. 연애와 결혼은 호감도 조사 평균값 상위층이 되어 기회를 부여받는 게 아니라 단 한 명의 여인에게 슈퍼 패스 한 장을 받아내는 일. 만인의 사랑을 미움받을 용기로 치환하면 누군가는 내 마니아, 내 팬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주변에 좀체 여자를 사귀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한번 장발을 권해볼까 싶다 (민머리는 왠지 Irreversible 한 느낌이라). 평범한 방식으로 평범한 수요를 충족하려고 애쓰지 마라, 너는 특별한 여자를 만날 운명이었으니까 - 뭐, 이런 멘트로 그들의 지난 세월을 위로하며.
p.s
참고로 내가 머리를 기르는 건 위와 같은 이유가 아니다.
아무튼,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