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에서
도쿄, 오사카, 삿포로 등 - 각양각색의 일본 도시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소감이 있다.
‘일본 가면 맛있는 게 참 많더라.’
여행을 다니다 보면 낯선 타국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한국과 공유하는 식재료가 많은 쌀 기반의 음식 문화이기 때문일까, 평생 한식만 먹은 사람도 일본에서만큼은 잘만 먹고 돌아온다. 오래된 노점 가게도 많고 미슐랭으로 대표되는 고급 식당도 많으니, 입맛 비슷한 한국인 입장으로선 근처에 이것저것 맛보기 좋은 여행지가 있는 셈이다.
2주 전에 친구들과 후쿠오카로 여행을 다녀왔다. 후쿠오카는 인구 200만이 안 되는 작은 도시이다 보니 색다른 콘텐츠나 거대한 관광 명소 등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또 부산과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일본 문화를 경험하러 다녀오기에 편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빵, 모츠나베, 야키토리, 각종 사시미 등 음식을 먹으러 다니기가 좋은데, 흔히들 ‘먹방 찍으러 간다‘고 표현한다. 나와 내 친구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근교에 괜찮은 료칸을 찾아 하루 다녀왔고, 나머지 날엔 먹고 싶은 거 잘 챙겨먹으며 맛있게 다녔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경우엔 염불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음식보단 술, 그 중에서도 증류주, 그 중에서도 위스키에. 이자카야로 가서 고구마, 보리, 쌀로 만든 소주도 한번씩 다 맛 보았고 삿포로 맥주 공장 견학도 다녀왔지만, 역시 백미는 리커샵과 바 투어였다.
리쿼샵은 최근 한국 위스키 애호가들에게도 유명해진 ‘샴드뱅 Cham de Vin’으로 갔다. 진열장에 들어설 땐 장난감 코너에 들어선 네살배기 꼬마처럼 신나 눈 돌리기 바빴다. 한국에선 20만원이 넘는 보틀이 거기선 8만원을 안하니, 참새에게 방앗간보다, 지하철의 델리만쥬보다, 아무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가 않다. 여행객이 한국으로 들어올 때 해외에서 1인 2병까지는 면세로 인정된다. 같이 간 친구들에게도 사가기 좋은 위스키를 추천해주고,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가격대로 두 병 골라 한국까지 모셔왔다.
바는 총 세 곳을 들렸는데, 하나 같이 정말 좋았다. 희귀한 독립병입 위스키와 구경도 하기 힘든 올드 보틀이 즐비했고, 한국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일본 증류소의 위스키까지 맛볼 수 있었다. 인상적인 위스키가 많았으나 가장 기억에 남는 모금을 묻는다면 마지막 날 마스터의 추천으로 마신 ‘닛카 17년 퓨어몰트’를 뽑을 것 같다.
요이치와 미야지쿄 증류소의 원액을 섞은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로, 야마자키에선 느끼기 힘든 특유의 쿱쿱한 일본 피트와 고소한 몰트가 어우러진 묵직한 풍미가 매우 매력적이었다.
질리는 자극 없이 꽉찬 맛, 묵직한 개성에도 부드러웠던, 정석적으로 참 훌륭했던 위스키! 이미 단종되어 보틀 가격은 하늘로 솟아 일본 옥션에서도 5만엔을 넘어가지만 바에선 글라스 3천엔 대로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정상적인 가격으로 구할 수만 있다면 데일리로 이걸 꼽고 싶다. 아, 어디서 누가 100ml만 가져다 줬으면.
그 다음으론 80년대 원액을 모은 1980's 요이치 싱글몰트를 추천 받았다. 그러나 한 잔에 8천엔..... 두 배가 넘는 가격은 열리려던 지갑을 멈춰주고 내 욕망과 궁금증도 눌러주었다. 고민 좀 하다 비슷한 체급의 위스키로 한 잔 더 주문해 여행의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또 지금 와서 글을 쓰며 생각하면 거기서 그 때 마시는 게 오히려 버는 거였다는, 착각 섞인 아쉬움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사치란 원래 천천히 급을 높여야하는 법 아닐까. 최상의 행복을 위한 현명한 소비 습관이었다고 믿고 살련다.
식문화를 파고 들어가다 고급 식당까지 경험한다고 해도 사실 술을 빼놓으면 ‘생각만큼’ 큰 돈이 들진 않는다. 국내에서 가장 비싼 스시야는 디너에 30만원 대이고, 미슐랭 3스타인 한식 파인다이닝 ‘가온’도 26만원 선이다. 이 정도라면 최상방 라인까지도 평균적인 직장인 월급으로 좋은 날에 한번쯤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일반인에게 먹스타그램, 오마카세 등 허세용 과소비 열풍이 불었는지도 모른다. 접근할 수 있는 하이엔드 중 가장 저렴하니까.
물론 한끼 식사치고 당연히 높은 가격이다. 하지만 위스키나 와인을 옆에 놓고 보게 되면 과하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동네 몰트바에서조차 괜찮은 위스키 몇 잔 마시면 몇십 만원은 우습게 깨지고, 국내외 유수한 레스토랑에 백만원이 넘는 와인 리스트가 즐비한 걸 고려하면 말이다.
사진에 등장한 <사마롤리 보모어 부케 1966>은 위스키계 GOAT를 논할 때 항상 나오는 역대급 보틀이다. 거래가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그 시세는 1억 이상(!)으로 평가 받는다. 이런 보틀은 실질적으로 소비하는 용도가 아니니, 접근 가능한 하이엔드로 내려와보자. 이름도 유명한 샴페인 돔페리뇽은 엔트리급도 면세가가 30만원, 레스토랑에서 시킨다면 백만원에 다다른다. 이래 저래 밥보다 술에 취미를 붙일 때 지갑은 가벼워지기 쉽다.
후쿠오카 여행 첫날, 바에서 혼자서 1만 5천엔을 지출했다. 여행 내내 1만엔이 넘는 식당을 간 적이 없는 걸 생각하면, 다 합쳐 200미리도 안 되었을 갈색 액체에 태운 것치고 상당히 큰 금액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행의 그 순간, 그 찰나만큼은 행복했으니 그걸로 된 것일까.
위스키 채널을 둘러보다가 먹는 데에 진심인 한 술집 사장님의 SNS 계정을 하나 발견했다. 프로필에 적힌 그의 캐치프레이즈가 눈에 띄었는데, ‘평생 아파트 평수만 늘리다 죽을 순 없다.’ 였다. 그 분의 욜로 컨텐츠를 보다보면 몇백, 심지어 몇천에 달하는 보틀을 턱하니 까기도 하는데, 확실히 오늘의 감각을 즐기며 사는 모습만큼은 자기 철학에 맞게 사시는 것 같다.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계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자유로운 그의 모습이 언제는 좋아보이더라도, 나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 평범한 우리는 어디 비좁은 골방 월세 살며 한끼 맛있는 거 먹는데 만족하고, 밀린 관리비를 뒤로 한 채 위스키 보틀만 빨며 살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확실히 어딘가 어긋난 라이프스타일 아닐까.
나무만 바라보고서는 달릴 방향을 모른 채 정처없이 떠돌기 쉽고, 숲만 보고 살다간 흙의 감촉과 나무의 향을 모른 채 죽는다. 우리는 숲도 보고, 나무도 만지며 살아야 한다.
밸런스, 밸런스, 밸런스!
밸런스는 위스키 시음평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을 관장하는 개념인 것이다. 마시기에 ‘적당한’ 위스키 가격은 얼마일지, ‘적당한’ 자켓은 또 무엇일지, ‘적당히’ 노는 것은 또 어느 정도일지. 사람마다 ‘적당히’가 어디인지는 모두 다르니 그것을 찾고 합의하는 것이 취향이요, 정치요, 감성이다. 경험과 고찰이 남기는 최고의 선물이다.
온갖 곳에서 튀어나오는 중도의 미덕, 나만의 중도가 어디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꽤나 멋지고 즐거운 삶의 방식이란 생각을 한다.
취향!
타인이 아닌 내가 정하는 밸런스는 취향이라 불릴 자격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