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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인 Mar 21. 2021

4화.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글

2017년 여름, 단편영화를 말아 먹고 우울과 무기력에 허덕였다. 그 괴로운 마음을 덜어주는 유일한 것이 글쓰기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그 말아먹은 작품 덕분이었다. 그 작품에서 맡았던 역할이 시인 지망생이었고, 소품으로 습작 노트를 만들어야 해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 썼던 시에는 배우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점점 멀어져 가는 현실과 이로 인한 무기력함,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시 쓰기를 통해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감정을 표출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지 못한 채

쉼 없이 뛰고 걷고 뒤돌아 달렸어

널 보고 뛰고 달리고 겨우 멈추어 서면

너는 날 모르는 사람처럼

영영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 간다.


스읍-하고 마른 모래먼지를 마시고

후-하고 쓴 목마름을 내뱉는다.


- 창작시 '완전 호흡' -


 이후 학교에서 연극 대본을 각색하거나 장면이나 극을 창작해 발표했다. 2019년에는 처음 쓴 단편 영화 시나리오가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했다.

내게 글쓰기는 시각장애로 인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이 불편해져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다. 오디션을 보지 않고 지인들과 함께하는 작업에만 참여했다. 오디션에 합격해도 주간에 낯선 환경에서 촬영을 하면 예상치 못한 난관이 가득할 게 분명했다. 단역 나부랭이가 이런 환경 저런 배려를 요구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었다. 연극무대의 암전과 계단이 점점 더 무서워졌다.

드라마에서 배우가 실내에서 실외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이나 환한 낮에 뛰어다니는 장면을 볼 때면 '나는 저거 못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숨이 턱턱 막혔다. 낙담했다. 한동안 또래인 배우들의 소식이나 작품을 보지 못했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삶을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질투가 났고 동시에 루저가 된 기분이었다.


포기할 수 없어 직접 글을 쓰고 그중에 작은 배역이라도 맡아 연기했다. 어느 날부터는 인쇄한 대본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2019년 여름, 여수에서 동료들과 촬영을 하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계단을 내려가거나 이동할 수 없었다. 야외에서 카메라의 위치도 파악되지 않았다. 돌계단이 많은 향일암에는 함께 올라가지 못하고 혼자 카페에 남아 동료들을 기다렸다. 무더운 날이었지만 나는 열사병에 걸리더라도 눈이 잘 보여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었다. 카페에 혼자 앉아 애꿎은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속상함과 미안함에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식고 가을비가 내리던 날,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심리상담을 신청했다. 상담을 받기 위해서 고민이 되는 상황에 대해 글을 써야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가상 의 인물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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