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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인 Apr 11. 2021

10화. 이런 얘기를 하게 돼 정말 안타까워요

"이런 얘기를 하게 돼 정말 안타까워요."

팀장님이 힘 빠진 목소리로 상부의 결정을 전달했다.

"기존의 기획들은 진행이 어려울 것 같아요. 전면 백지화하라는 결정입니다."

이어서 팀장님은 상부에서 직접 정해준 기획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동안 우리가 작업한 많은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유튜브 채널은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고 시각장애인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게 컨셉이었다.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팀원들과도 합이 잘 맞았고 무엇보다 시각장애인 당사자로서 그 이야기를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다양한 아이디어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어떻게 영상화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나갔다. 작가, 가수, 피디에 작곡과 연주가 가능한 사람들로 창작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팀원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장점을 살려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기획도 세웠다.

각자의 일을 분담하고 제작 프로세스를 갖추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며 크게 세 가지의 기획으로 틀을 잡았다. 일상 브이로그나 먹방과 같은 친근한 내용의 기획부터 시각장애계 이슈나 소식, 인물을 소개하는 정보성 기획, 우리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곡을 뮤직비디오로 만드는 창작물 기획을 하나하나 구체화하며 진행해갔다.

 하지만 이런 기획에 대해 상부와는 초반부터 의견 차이가 있었다.

채널의 첫 영상은 상부의 제안대로 시각장애인 공연팀의 축하 공연과 각종 인사들의 축하 멘트로 채워졌다. 많은 관심과 축하 속에서 채널을 오픈하는 것도 좋았지만 나는 시각장애인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채널인 만큼 조금 더 일상적인 내용의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팀원들은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영상을 기획하게 됐고 나의 경우는 일상 브이로그를 제작했다.

 조회 수도 잘 나오고 주변의 반응도 좋았지만 상부에서는 내 영상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왜 쟤가 주인공처럼 나오느냐, 쟤가 시각장애인을 대표할 수 있냐라는 의견이 나왔다고 했다.

조금 기분이 상했다. 나는 채널의 주인공이 될 생각도 없었고 시각장애인을 대표할 마음도 없었다. 시각장애인의 한 사람으로 작은 내 이야기를 전한 것뿐이었다. 내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고 주말까지 반납하고 재촬영까지 해서 만든 영상이었는데 그런 피드백을 들으니 힘이 빠졌다. 그리고 '완벽하게 시각장애인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상부의 반응에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우리 팀은 기존의 일정대로 요리 챌린지와 왓츠 인 마이 백,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어플 소개 등 계획했던 촬영을 하나씩 진행해 갔다. 창작곡 작업도 마무리 되어갔고 뮤직비디오 제작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 제작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로 한 날, 팀장님이 기존 촬영분과 다른 기획을 모두 백지화하라는 결정을 전해왔다. 조율이 아닌 통보였다. 촬영분을 보지도 않고, 프레젠테이션을 들어보지도 않고 정해진 일이었다. 그 내용을 전달받고 복지관과 내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애초에 원하는 기획들을 지시하지 자율적으로 제작하라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다 엎으라는 결정이 조금 황당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상부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조직 내에서 이뤄지는 일이 개인이 원하는 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팀원들과 공들여 작업한 일을 보지도 않고, 앞으로의 계획들에 대해 듣지도 않고 엎어버린 일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이후 내가 하는 일은 간단하고 단순해졌다. 하라는 일만 성실하게 해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성향상 자율성을 반영하지 못한 일을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그 일은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고 나에게도, 복지관에도 도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고맙게도 팀원들 모두 나의 결정을 존중하고 지지해주었다.


그리고 '우리 정인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오픈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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