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원의 무게
모니터 오른쪽 하단, 오후 3시 48분. 낮게 웅웅 거리는 노트북 팬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방 안에서 나는 일곱 번째 이력서를 보고 있었다. 마우스 커서가 '파일 첨부' 버튼 위에서 깜빡인다. 손가락 끝에 닿는 플라스틱의 감촉이 서늘했다.
이력서의 첫 줄은 2000년, 갓 대학을 졸업한 시절의 교원 자격증이다. 그 아래로 2025년의 AI 활용능력 자격증이 나란히 놓였다. 25년이라는 세월이 A4 용지 한 장에 압축되어 있었다.
숫자들 사이의 공백은 내가 살아온 16년의 교습소 생활이다.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시험 기간이면 목이 쉬도록 설명하던 '원장님'의 시간이 그 빈칸에 고여 있었다.
임신과 출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삶의 굵직한 사건들 속에서도 나는 한 번도 일을 멈춘 적이 없었다. 노동의 대가는 당연한 듯 통장에 찍혔고, 그 숫자는 나를 지탱하는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교실 밖으로 걸어 나온 지금, 통장에 찍힌 '0'이라는 숫자는 생전 처음 보는 외국어처럼 낯설고 공포스럽다. 0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쓸모를 증명할 길이 사라졌다는 선고 같았다.
50대 여성의 재취업 준비가 이토록 외로운 일인 줄 몰랐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슷한 길을 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나보다 빠르게 전환한 사람들은 현장에 넘쳐나고, 실패의 무게를 나눌 곳은 없다.
이번 주에만 벌써 일곱 번째다. 여성발전센터와 시니어 복지관. 내가 알던 세상보다 훨씬 크고 차가운 세상의 문을 두드린다.
'50세'라는 숫자를 입력할 때마다 잉크가 번지는 듯한 묵직한 압박감을 느낀다. 16년의 경력을 괄호 속에 밀어 넣고, 생소한 AI 프롬프트를 내세우고 익숙한 수학 공식은 뒤로 배열하며 나를 재조립한다. 내가 가진 것이 유효기간 지난 영수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클릭. '지원이 완료되었습니다'
라는 무미건조한 팝업창이 떴다. 창밖은 어느새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이력서가 전송된 곳에서 연락이 올지, 아니면 여덟 번째 이력서를 써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50대의 이력서는 검증과 의심의 눈으로 읽힌다. 같은 자격증이라도 나이 앞에서 무게감이 달라진다.
오늘 내가 한 일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판을 두드린 것뿐이다.
다만 나는 다시 빈 노트를 펼치고 연필을 쥔다. 내일 또 무엇을 배울지(Imparo), 어떻게 나를 다시 세울지 적어 내려간다. 아직 정답은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0이라는 숫자 뒤에 숨지 않았다.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는 대신, 내일의 날짜를 미리 적어둔다.
아자아자! 박소희.
오늘도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