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의 교실을 비우고 찾은 작가의 책상.
꿈속에서 나는 여전히 강단에 서 있었다. 문제집이 가득한 교실에서 아이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다 눈을 뜨면, 적막한 방 안에는 서늘한 새벽 공기만 감돌았다. 어제 예약 발송으로 걸어둔 서부여성발전센터의 이력서가 떠올랐다. 연락이 올까. 과연 나를 다시 불러주는 곳이 있을까. 먹먹한 불안이 이불처럼 몸을 덮쳐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익숙한 동선을 따라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학생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빨간 색연필, 문제집, 수식을 쓰기 위한 이면지.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
오랫동안 학생들의 차지였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서리가 닳은 낡은 교재들과 제 주인을 잃은 연습장들을 상자에 담아냈다.
16년. 아이들의 성적과 숙제 검사로 빼곡했던 시간들이 종이 뭉치가 되어 발밑에 쌓였다. 이 책상은 늘 여기 있었다. 아픈 날도, 지친 날도, 이곳에 앉으면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먼지를 닦아내는데, 방문이 열리고 남편이 들어왔다.
“이제 애들 가르치는 거 안 해?”
비워진 책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이들이 숙제를 안 해와서 성취감이 떨어진다는, 절반의 진실만 섞어서. 남편은 낡은 책상 상판을 쓸어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조금 쉬어도 돼. 그동안 고생했잖아.”
그의 말은 다정했으나, 나는 아직 품 안의 이력서를 꺼내 보여주지 못했다. 쉬어도 된다는 말이 고마우면서도, 그 말이 곧 나의 쓸모가 다했다는 선고처럼 들려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수업은 접었지만 봉사활동이라도 나갈 거라는 말로 겨우 속내를 아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는 다시 홀로 비워진 책상 앞에 앉았다.
정리를 끝낸 책상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아이들에게 넓은 자리를 내어주고 나는 모서리에 걸터앉듯 노트북을 두드렸는데, 이제야 오롯이 나만의 자리가 생겼다.
한 뼘뿐인 공간이었지만, 그곳은 이제 누군가의 성적을 올리는 곳이 아니라 나의 문장을 적는 영토가 되었다.
16년 동안 내 것이었지만 진짜 내 것은 아니었던 이 공간이, 이제야 비로소 나를 위해 비워졌다.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먼저 밀려왔다.
진이 빠진 몸으로 노트북을 켜고 교보퍼플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오랫동안 다듬어온 첫 책의 출간 등록을 시작했다.
표지는 어떤 걸로 할까. 제목 위치는 여기가 맞나. 마크는 어디에 삽입하지. 익숙하지 않은 절차들이 발목을 잡았다. 분명 간단해 보이는 작업인데 손이 자꾸만 멈췄다. 아이들 문제집은 그렇게 빨리 채점하던 손이, 내 이름이 들어갈 책을 만드는 일 앞에서는 조심스러워졌다.
마우스 클릭 소리만 가득한 오후가 저물어갔다. 창밖으로 노을이 번지기 시작할 때쯤, 마침내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출판은 산고의 고통에 비유되곤 합니다.
검수 기간은 영업일 기준 2~3일 소요됩니다.
모니터에 뜬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울컥함이 차올랐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서기 위해 언젠가는 가보고 싶었던 길이었다. 종이책 등록을 마치고 전자책 승인까지 끝내고 나니, 책상 위로 내려앉은 노을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같은 창문, 같은 시간, 같은 빛이었지만, 이 빛을 받는 내가 달라진 것이다.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던 손으로, 이제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누군가의 문제를 풀어주던 시간에, 이제는 나 자신의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여전히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배우고, 만들고, 나누는 사람이라는 것.
내일은 반포평생학습관으로 향한다. 스마트폰 활용 보조강사라는 소박한 이름의 봉사직이다. 누군가는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고 하지만, 내 마음의 시계는 여전히 현역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비워진 책상 위로 작가라는 이름이, 그리고 다시 시작될 강사라는 이름이 나란히 놓였다. 16년 동안 학생들과 공유했던 이 공간이, 이제는 온전히 나의 영토가 되었다.
내일 입고 갈 옷을 미리 꺼내어 걸어두었다.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될까. 불안하지만, 이제는 기대해도 되겠지.
아자아자! 박소희.
오늘도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