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의 전문성으로 다른 세계에 길을 내다
3시간이라는 시간의 밀도
3시간 동안 이어진 스마트폰 수업. AI 앱 활용은 중장년에게도 버거운 일인데, 시니어 어르신들에게는 더 험난한 산처럼 보였다. 여기저기서 도움을 요청하는 손들이 깃발처럼 솟아올랐다.
"선생님! 이게 안 돼요!"
"여기 눌렀는데 화면이 이상해졌어요!"
"아이고, 내가 뭘 잘못 건드렸나..."
주 강사님은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셨지만, 강의 속도와 어르신들의 이해 속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간극이 있었다. 나는 보조 강사로서 강의실 곳곳을 누비며 하나하나 손을 잡아드렸다.
한 어르신의 간절한 SOS
2교시 중반, 한 어르신이 간절한 SOS를 보내셨다.
"선생님... 저기, 미안한데 좀 봐줄 수 있을까요?"
어르신의 스마트폰 화면은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림창들과 제멋대로 흩어진 앱들이 작은 화면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손자가 한 번씩 만지고 나면 점점 복잡해지네. 찾으려고 해도 어디 있는지..."
어르신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 수업 진도에 뒤처지는 것에 대한 미안함.
나는 어르신의 굽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며 하나씩 길을 냈다. 그분에게는 주 강사의 진도보다 당장 눈앞의 무질서를 정돈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으리라.
30년 사서 경력자의 환한 미소
"선생님, 이게 여기 있었네. 속이 다 시원하구먼."
내 곁에 앉은 어르신이 환하게 웃으셨다. 중앙도서관에서 30년 넘게 사서로 일하셨다는 분이다.
"도서관에서는 청구기호만 알면 뭐든 찾을 수 있었는데, 이 작은 전화기는 내 맘대로 안 되더라고. 손자한테 물어보면 '그냥 찾으면 되지' 그러는데, 내가 찾는 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요."
어르신의 말씀에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해드린 건 그저 어질러진 화면을 가지런히 모으고, 자주 쓰는 것들을 맨 앞으로 꺼내놓은 것뿐이었데.
"언제 오냐"는 말이 주는 마법
수업이 끝나고 짐을 챙기는데, 그 어르신이 강의실 밖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오셨다.
"선생님."
"네."
여태껏 왔던 선생 중에 제일 편하게 가르쳐줬어. 다음에 또 오는 거지? 언제 와?
언제 오냐.
그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았다. 언제 오냐는 말을 들은 게 얼마 만이었을까.
다음을 기약하는 어르신의 눈빛 속에서 나는 16년 동안 익숙하게 누려왔던, 그러나 최근에 잠시 잊고 있었던 '뿌듯함'의 감각을 되찾았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인사를 건네며 나는 비로소 숨을 크게 내쉬었다. 누군가의 막막함을 해소해 주었다는 개운함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방 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여성발전센터였다. 며칠 전, 중등 수학지도사 과정에 AI를 보조기구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을 담아 제출했던 중등 수학 지도사 강의 제안서에 대한 답신이었다.
"선생님, 제안서 잘 보았습니다. 24일과 29일에 면접 가능한 시간이 있으실까요?"
멈추지 않고 계속 제안서를 쓰고는 있었지만, 과연 내 기획이 세상에 통할지 막막하던 차였다. 첫 번째로 걸려온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29일까지 기다릴 여유조차 없었다. 단 하루라도 빨리 내 안의 가능성을 확인받고 싶어, 가장 빠른 24일을 택했다.
이틀 만의 기적
학생들의 책상을 비우고 나만의 자리를 만든 지 고작 이틀 만에, 세상이 다시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려 하고 있었다.
내일은 12월 24일이다.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이브이겠지만, 나에게는 새로 성인대상 강좌에 도전하기 위한 면접의 날이다. 책상 위에는 이제 아이들의 문제집 대신 내가 만든 강의 제안서가, 노트북 화면에는 AI를 활용한 그래프의 움직임이 펼쳐져 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제안서를 쓰고는 있었지만, 과연 내 기획이 세상에 통할지 막막하던 차였다. 16년 초중등 수학 강사로서의 내 전문성이, 성인 교육 시장에서도 통할까?
나는 다시 펜을 들고 내가 보여줄 새로운 수학의 지도를 그려본다.
중등 수학이라는 익숙한 영역.
성인 교육이라는 새로운 시장.
정답은 아직 알 수 없다. 내일의 면접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내 제안이 받아들여질지.
하지만 적어도 길을 잃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노트북 팬 돌아가는 소리가 오늘따라 경쾌하다.
아자아자! 박소희.
오늘도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