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인 및 판매 중
2025년 12월 31일 특별한 날이라기보다는 올해의 마지막 날.
가족들은 사회생활이라고 부르는 연말 약속을 위해 하나 둘 집을 나섰다. 텅 빈 집안에 남겨진 것은 조용함과 며칠 동안 나를 괴롭히던 강의 제안서 파일들뿐이었다. 12월 내내 쏟아부었던 이력서들은 소식이 없거나 거절의 답신으로 돌아왔다. 떨어지는 일에 내성이 생길 법도 한데 '무소식'은 내 마음을 여전히 쿵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어제까지 제안서에 파묻혔던 나에게 쉼을 주기로 했다. 보름 전 승인 신청했던 첫 성인 동화 '소희의 작은 빛'을 쓰며 구상하던 여러 조각들 중 하나인 '슬기의 상자'라는 한글 파일을 불러왔다. 나와는 다른 현 시대의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 어린이 그림 동화다. 초고를 다시 다듬는 작업은 반나절을 훌쩍 가져갔다. 문장을 다시 보고 덜어내고 살을 붙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대신 이곳에는 서류 전형의 통과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없었다. 오로지 나와 슬기만이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오지 않는다.
'슬기의 상자'의 스토리를 마무리하고 제일 어려운 삽화를 만들기 위해 AI 친구들과 접속했다. 그들도 오래 일하면 과부하가 걸리는데 오늘은 슬기의 손을 3개로 만들어 놓았다. 아동 그림 동화가 공포물이 될 뻔한 순간, ‘큭큭’ 웃음이 터졌다. 엉뚱한 결과물에 화를 내다가도 새 창을 열어 AI를 달래며 이미지를 완성했다.
시계를 보니 23시 54분! 하던 일을 멈추고 후다닥 거실로. 내 옆에 있던 공주도 호다닥 따라 나온다. 거실에는 타종 치는 것을 함께 보고 새해 인사를 하기 위해 아들들과 남편이 있다.
“뎅! 뎅! ...뎅!”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엔 건강하자.”
“새해에는 즐겁게 살자.”
새해 인사를 마치고 남편은 참았던 잠을 쏟아진다며 자러 갔고 아들들은 친구들에게 새해 인사를 보내야 한다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크리스마스 때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미안했었는데 먼저 말해주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다시 홀로 모니터 앞으로 복귀. 출판 승인 신청을 마무리하기 위해 BOOKK에 들어가 보니 지난번 신청했던 원고가 로고 색상 오류로 반려되었다는 메시지에 피식 웃음이 났다. 지속되는 제안서 작업에 뇌가 지쳤나? 상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들어냈다. 실수를 바로잡고 새 원고를 등록했다. 두 번째다 보니 확실히 수월했다. 교보문고의 퍼플에도 들어갔다. 별다른 기대 없이 '나의 POD 콘텐츠' 탭을 눌렀다.
화면에는 '승인 및 판매 중'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엉?' 하는 마음으로 다시 확인! 진짜 승인이 되어 상품 코드를 가지고 판매되고 있었다.
'내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고?'
'소희의 작은 빛'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어린 소희의 실제 이야기. 나 혼자 마음속 깊이 넣어두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았다. 글을 쓰면서 그 시절의 내가 안쓰러워서 울기도 했었다. 그 과정에서 어렸던 소희의 상처가 치유된 것일까. 마음이 봄날의 땅처럼 새순이 올라올 것 같이 말랑말랑 해졌다. 그런 이야기가 담긴 책이 교보퍼플에서 얼굴을 드러내다니. 기특했다.
다른 이가 보기엔 교보문고 오프라인 매장에 놓인 것도 아닌, POD 콘텐츠로 판매하는 것이니 작아 보일 수도 있다. 그 작은 빛이 12월 내내 차가웠던 내 마음에는 큰 새해 선물이 되었다. 나의 어린 소희가 어른이 된 소희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어른이 된 소희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일을 기약하며 모니터를 끄고 사랑스런 공주가 있는 양털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오늘도 잘했다. 아자아자! 박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