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화면 위에서 깜빡이던 기억

우리가 함께 넘어야 할 디지털이라는 문턱에 대하여

by studio imparo 소희

새벽 0시 43분.

집 안에는 컴퓨터 본체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만 들린다. 발치에는 나를 기다리다 잠든 반려견 쎄뇨가 머리를 내 쪽으로 향한 채 누워 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붙어 있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전해져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진다. 쎄뇨의 규칙적인 숨소리는 고요한 방 안을 채우는 가장 다정한 음악이다. 낮 동안의 소음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에 적막이 고이자, 비로소 모니터 속 글자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1월 14일까지 제출해야 할 강의 제안서는 다섯 곳. 모두 중장년의 새로운 인생 설계를 돕는 기관들이다. 화면 속에는 '인공지능', '생성형 AI', '디지털 도구' 같은 차가운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다. 나는 이 단어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말랑말랑한 온도의 문장으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며 키보드를 톡톡 두드린다.


불과 몇 달 전, 나 역시 저 단어들 사이를 헤매던 수강생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익히고 싶어 왕복 몇 시간이 걸리는 강의실을 찾아다녔다. 실습을 따라가기 위해 필기 노트를 훑으며 밤을 새우던 날들. 그때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예순 남짓의 한 여성 수강생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소희씨 나이 정도만 되어도 따라가겠는데, 나는 조금 버겁네."


그녀는 화면 속 메뉴 하나를 찾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듯했다. 나라에서 AI를 배우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하기에 용기 내어 와 봤는데, 자꾸 옆 사람에게 물어보게 되어 미안하다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그저 괜찮다는 듯 마주 웃어 보였지만, 사실 내 마음도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나 역시 새로운 기술 앞에 서면 대학 입학 직전의 겨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 모아둔 용돈을 털어 비싼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었다. 그곳에서 몇 달간 땀 흘리며 배운 것은 까만 화면에 명령어를 직접 입력해야 했던 'MS-도스(DOS)'였다. 하지만 막상 입학한 캠퍼스에는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Windows 95'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긴 밤을 꼬박 새우며 외웠던 그 명령어들은 하룻밤 사이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억울하고 막막했던 기억이 지금의 중장년들이 느끼는 디지털 장벽과 겹쳐 보였다.


강의안을 수정한다. 내가 먼저 겪어본 시행착오를 징검다리 삼아, 그들이 덜컹거리는 길을 조금 더 부드럽게 지나갈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다. 전문 용어를 걷어내고, 손가락이 기억할 수 있는 순서를 배치한다. 10년 넘게 해온 학생들 수업과는 또 다른 무게감이 손가락 끝에 실린다. 머리가 지끈거릴 때마다 잠든 쎄뇨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는다. 손을 뻗어 쓰다듬고 싶지만, 혹여나 단잠을 깨울까 봐 가만히 눈으로만 온기를 담는다.

'고롱고롱' 작은 숨소리로 나를 안아주는 쎄뇨

내일은 모니터로만 보던 이 제안서들을 종이로 출력할 생각이다. 화면 위의 글자들보다, 손에 잡히는 종이 위에서 글의 빈틈이 보이기 때문이다. 최신 기술을 가르치는 제안서를 쓰면서도 여전히 종이로 확인해야 안심하는 나의 구식 습관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가장 필요한 친절함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밤은 깊고, 내가 만든 커리큘럼이 누군가의 새로운 시작에 작은 디딤돌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늘 하루 내가 쏟은 시간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안도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의 한마디 오늘도 잘했다. 아자아자!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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