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udio Mountain Oct 06. 2017

[이방인] 비움과 그늘의 미학

소격동 이방인의 공간은 빈 공간 속 그림자 하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 내는 그늘의 무늬,
명암에 있다.  - 『음예예찬 』中, 다니자키 준이치로







나는 자주 저 장지 앞에 멈춰 서서, 밝지만 현란함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종이 면을 응시하는데, 큰 가람 건축의 다다미방 등에서는 정원과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점점 광선이 약해져서, 춘하추동 맑은 날도 흐린 날도, 아침이나 낮이나 밤이나,
거의 그 희미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세로로 퍼진 장지 문살의 한 칸마다 생긴 구석이, 마치 먼지가 묻은 것처럼, 영구히 종이에 착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의심이 든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 꿈같은 밝음을 의아해하면서 눈을 깜박거린다. 뭔가 눈 앞에 아지랑이 같은 것이 있어서, 시력을 둔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음예예찬 』中, 그늘에 대하여





어둠을 예찬하다


"음예예찬"을 아시나요?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1930년대에 쓴 음예예찬은 일본의 고전적 미의식을 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음예예찬에서의 이 '음예'는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그늘'이라고 번역이 되어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에 따른 사물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명암을 의미합니다. 그가 예찬하는 '그늘'은 '사과', '컴퓨터'같은 구상 명사가 아닌 '아늑함', '평화'같은 추상명사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다소 어려운가요? 음. 준이치로는 '어둠'에 대한 애착 또한 깊었는데요. 그가 말하는 어둠은 마냥 깜깜한 검정이 아니라, 그늘과 시간과 흔적이 겹겹이 쌓여서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짙고 묵직한 어둠을 뜻합니다. 이제 조금 느낌이 오실지 모르겠네요. 그늘과 어둠은 짧은 시간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조용하고 어둑한 곳에서 나뭇잎이 흔들리는 바람소리, 나무 바닥의 삐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몇 백 년 지난 흙벽의 냄새와 함께, 지금 이 공간의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밤거리를 환히 비추는 서구식 가로등을 보면서 서구 문화가 가지고 온 편리함과 빠름이 과연 우리 동양인들에게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미의식을 그늘의 명암에서 조차 음미해내는 세심한 관찰력과 탐미안이 돋보이는 철학입니다.



텃마루에 앉아서 발견한 창문살의 그늘


이방인을 통해서 한옥 공간에서 처음 작업을 해볼 기회가 생겼는데요. 

여기 또 한 명 오랜 시간을 텃마루에 앉아 공간 브랜딩을 고민하다 그늘을 발견한 사람이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이방인의 공간과 브랜딩의 모티브는 음예라는 일본 미의식의 개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의 커리를 변형한 일본식 카레 요리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하여 선보이는 것인 만큼, 동양의 미의식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디자이너로서는 당연한 순번이 아닐까 싶어요. 


앞편에서 말씀드렸듯이 서울의 한옥들은 대부분 근대화와 함께 지어진 도시형 한옥입니다. 전통적 한옥이 근대화와 함께 발전한 모델이지요. 급증하는 서울 인구에 빠르게 많은 집들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전통 한옥 재료와 산업화로 탄생한 재료들을 조합하여 지은 집들이 도시형 한옥입니다. 제한된 필지에 될 수 있으면 많은 가옥들을 짓느라 이러한 한옥들의 사이즈들은 기본적으로 크지 않습니다. 다닥다닥 붙어있게 되다 보니 프라이버시에 대한 문제들이 생기면서 입구면을 벽으로 가리는 ㅁ자형 가옥으로 변형이 되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전통 한옥에 비해서 여백 없이 밀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전통을 재해석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방인의 공간 또한 10평이 채 되지 않는 아담한 사이즈의 계량형 한옥이었습니다. 


이방인의 디자인 영감이 떠올리기 위해 하루 종일 앉아 있던 툇마루


좁은 공간에 밀도 있게 기능과 동선을 효율적으로 설계하는 스튜디오 마운틴의 장점이 쿠쿠 이케부쿠로와 히마와리를 통해 입증이 되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왠지 이 공간은 무언가를 가득 채우기보다는 움에서 생겨나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옥 그 자체에서 전달되는 시간과 역사의 흔적들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 아담하고 좁은 공간 안에서 비워내는 디자인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루 종일 툇마루에 앉아 고민하기를 수없이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선잠을 깨기 위해 기지개를 켜던 와중에 중정으로 햇빛이 들어왔는데, 그 햇빛이 앉아있던 툇마루를 지나 문창살에 다다르자 창호의 격자를 따라 그림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 그림자 하나면 충분하겠구나."




창호 그림자를 공간에 투영하여 이방인의 아이덴티티를 최소한의 디자인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림자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창살의 무늬와 그 창호 무늬에 비친 빛을 따라 만들어지는 그림자. 이것은 중앙 공간에 격자 형태의 한국 전통 목가구의 짜집기 방식 선반과 향신료 디스플레이의 아이디어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브랜딩에도 적극 반영하여 한국적인 소재인 소양 한지에 그림자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격자무늬를 프린팅하고 각각의 향신료 병을 포장하는 것을 구상해보았습니다. 각각의 향신료 재료들은 색깔과 텍스쳐 만으로도 심미적인 효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고객들로 하여금 건강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투명한 병에 각각의 향신료 모티브를 일러스트레이션 에티켓으로 적용해서, 우리가 선보이는 낯선 음식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한옥 창호에서 발견한 격자 무늬와 명암  
각 재료의 모티브를 에티켓으로 적용한 향신료의 브랜딩. 격자 무늬를 한지에 프린팅하여 가죽 끈으로 감아 패키징 하였습니다. 각각의 텍스쳐와 색감이 돋보입니다.




공간과 브랜딩: 비움의 미학


일본 예술가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다니자키의 글을 예로 들며 자신들의 작품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스스로의 뿌리를 밝힙니다. 그중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무인양품의 디자인을 탄생시킨 하라 켄야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무인양품의 브랜드 철학은 이미 무지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광고에서 직관적으로 표현이 됩니다. 어떠한 다른 메시지로서의 카피 문구도 넣지 않았습니다. 여백이 많은 백야의 풍경에 유일하게 있는 것은 저 멀리 형체만 보이는 사람(수도승)과 수평선에 걸쳐 있는 MUJI의 로고타입. 아무런 메시지가 없기 때문에 수용자는 이 배경과 여기서 느껴지는 여백의 아름다움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다양한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MUJI의 네 개의 글자조차도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적절히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있습니다.  Emptiness. 비움. 비움을 통해서 그 자체로 텅 빈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 측이 그 빈 공간에 의미를 담아내며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있다.
『디자인의 디자인 』中, 하라 켄야



이방인 공간의 실측 도면입니다.
비워내는 디자인을 위하여 여백 여백 그리고 여백 만을 고민했지요.



이방인의 공간은 계량 한옥 특성상 접객 시 실제 사용 가능한 평수가 10평 미만이었습니다. 접객 가능한 테이블 수가 매출과 직결되기 때문에 히마와리 쿠쿠와 같이 이방인 역시 동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아주 중요한 미션이었습니다. 동시에 처음 공간을 마주 하였을 때 영감을 받았던 그늘의 아름다움 그리고 비워지는 디자인과 여백에 대한 고민을 더하려니 쉬운 일은 아녔죠. 


결론적으로 최소한의 디자인으로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동시에 기능에 충실한 공간을 만들자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공간에서 브랜드의 컨셉을 보여주는 공간은 입구와 한옥 정면으로 최소화하고, 나머지 공간은 충분한 좌석 확보와 조리공간의 설계라는 기능성을 고려하여 미니멀하게 구성하고자 노력하였고요. 테이블과 좌식 탁자의 위치도 바닥에 바둑돌을 놓듯 신중하게 여백만을 생각하며 배치하였습니다.  


나머지 공간은 부엌과 테이블, 카운터 만으로 구성했습니다. 10평 미만 공간에 최소 15인 착석가능 ~ 클리어!!!



브랜딩의 꽃 : VMD와 씨즐효과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최소한의 디자인은 공간에 과연 어떻게 적용되었을까요? 이방인에 들어가는 입구면과 한옥 정면 방에는 이방인의 카레에 들어가는 향신료를 디스플레이로 이방인의 핵심 가치인 친환경주의, 크리에이티브 푸드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히마와리 편에서 "씨즐효과"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궁금하신 분들은 [히마와리] 왕십리에 핀 해바라기 편, 참조 바래요.~ )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와 향신료들을 브랜딩의 꽃(VMD- Visual Merchandising)으로서 고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했던 것이죠. 주소재로는 삼나무, 낙엽송과 기왓장 등을 함께 사용하여 이방인의 곱창카레는 이국적인 재료들을 한국적이며 전통적으로 재해석한 음식이라는 것을 보다 직관적으로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격자 창살 형태에서 발전시킨 향신료 디스플레이 선반 
투명한 병으로 어디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소박한 형태의 한국 양봉 협회 꿀병을 사용 하였습니다.
 입구면 공간 두번째 VMD 시안
이방인 집기에 수납 집기 등에 사용되었던 머테리얼.



0.8평 기적이 필요하다!


반면에 가장 높은 밀도로 디자인을 해야 했던 공간은 바로 부엌 공간입니다. 부엌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실측해보니 1평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우 곱창카레의 조리 과정은 곱창을 손질하고, 카레에 들어가는 향신료를 조합하여 양파를 장시간 볶아 카레를 우려내는 등의 사전 조리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차 조리에 필요한 공간은 근교에 임대료가 싼 공간을 확보하여, 식자재 보관과 조리 전용 키친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밑 작업이 된 재료와 카레를 운반할 작은 트럭도 구입하였지요. 


드디어 이방인 공간의 부엌은 1차 조리된 재료들을 간단히 조리하여 바로 서빙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어도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디자인을 하려니 0.8평의 부엌 공간은 생각보다 실제로는 더 비좁았어요. 고민 끝에 접시 기타 집기 등은 상단에 사방으로 붙박이장을 짜서 효율적인 수납을 할 수 있도록 기능성을 중심으로 효율적이고 입체적으로 설계하였습니다. 최소 2명이 양쪽으로 무리 없이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머릿속으로 조리 동선을 수 없이 시물레이션 하면서 정말이지 머리를 쥐어짜며 ㅜㅜ 설계에 임했어요.


 수납공간을 정확하게 확보하고자 그릇 및 모든 집기 를 3D로 모델링하여 시물레이션.


  4구렌지/ 덕트/ 곱창구이기계/ 인덕션 2/800 짜리싱크/ 잔반처리기계 /조리대/ 대형밥솥->미니냉장고/ 상하부수납 셋팅
 짠~! 시공후 기능성을 최대한 살린 0.8 평짜리 부엌전경입니다. 정말 있을건 다 있게 되었네요  =3



또한, 한국의 자연미를 담아내자.


화룡점정으로 요리를 담아내는 그릇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생소한 음식이어도 담아내는 그릇과 플레이팅에 신경을 쓴다면 음식을 접하는 고객 입장에서는 정성스러운 음식이라는 이미지를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패키징과 플레이팅 또한 브랜딩의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지점입니다. 일본식 카레라는 메뉴에도 불구하고 이국적인 음식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아이덴티티를 전달하기 위해 이천 가마에서 제작되는 전통 도기 그릇들을 픽업하고 일부는 커스텀 메이드를 하여 구성을 했습니다. 




한 끼 식사이지만 이방인을 접하는 사람들이 플레이팅을 보았을 때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마치 한옥 중정에 굴러다니는 아기자기한 조약돌과 같은 오브제로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자연미를 추구하는 한국의 전통성과 일본의 미적 감각을 그릇의 형태와 색감, 섬세한 플레이팅을 통해 이방인만의 독창성과 심미적 아름다움을 적절히 담아내려 한 의도가 느껴지시나요? 



후기


이방인의 브랜딩은 이국적인 음식을 어떻게 전통적으로 재해석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브랜딩의 지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진행되었던 브랜딩이며, 공간의 활용 또한 서구적인 효율성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관념의 비움을 통해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올 수 있는 비효율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단가계산부터 많은 부분을 철저하게 계산하에 진행하였고요. 오픈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되었으며, 테이스티로드 1회 방영 등 각종 매스컴에 금방 소개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개인 사정으로 운영이 되고 있지 않아 아쉬움이 크지만, 이후 다른 업장에서 저희가 기획한 비슷한 요리를 따라 선보이며 호응을 얻기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던 작업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방인의 곱창카레 한상차림





이번에는 많은 것을 덜어내고 비움을 통해 완성했던 이방인의 브랜딩 과정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음에는 레트로 컨셉으로 진행되었던 효자 바베의 브랜딩 과정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다음 편에서 뵈어요~! 



ⓒ2017 Studio Mountain
스튜디오 마운틴은 브랜드 기획을 기반으로 2013년 설립된 토털 브랜딩 스튜디오입니다.
http://studiomountain.kr



매거진의 이전글 [이방인] 낯설음의 존재방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