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라이딩은 우리 인생을 닮았다
라이딩 중 가장 또렷이 기억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와 기계의 리듬이 정확히 맞물리는 순간, 기술이 단순한 성능을 넘어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발칙한 로드 자전거 바이블』 중 「로드 자전거 구동계, 드디어 승리의 아이콘이 되다」 편에서 무선 구동계가 보여준 그 ‘기계의 리듬’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전자식 구동계의 일관성은 한 번의 변속을 ‘행위’가 아니라 ‘문장부호’로 바꿉니다. 문장의 흐름을 그대로 둔 채 쉼표 하나만 찍듯, 주행의 문법이 매끄러워지고 집중력은 그만큼 남습니다. 코너 진입 속도, 바람 방향, 노면 질감, 오르막 경사—예전엔 변속 타이밍을 찾던 불안이 이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라이딩의 질이 달라졌다고 느낀 지점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변속이 빨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오래 집중할 수 있게 된 것—거기에 더해 투르 드 프랑스 선수들이 우승을 향한 여정에서 느꼈을 정교한 변속 감각의 동질감까지."
전자식 구동계로 나서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좋았습니다. "내가 더 오래 집중할 수 있게 된 것." 어떤가요? 글쓰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새벽 같은 시간, 같은 맥북 앞에 앉아 “기계의 리듬이 사고를 정돈시킨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노트북은 글의 리듬을 유지시켜주는 메트로놈이었습니다. 조앤 K. 롤링은 카페 구석에서 손에 익은 펜으로 『해리포터』의 첫 문장을 써내려갔습니다. 손끝의 압력과 잉크의 흐름, 종이의 질감까지—모두 그녀의 상상력의 톱니였습니다. 폴 오스터는 오래된 스미스코로나 타자기에서만 글을 씁니다. 그에게 타자기의 딱딱한 타건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생각이 언어로 변하는 리듬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의 도구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구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집중의 구조였습니다. 라이딩을 매끄럽게 잇는 구동계처럼, 그들은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기계적 호흡을 통해 사유의 흐름을 조율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사랑하는 작가의 방식을 한 번쯤 따라 해 보는 것도 사유의 리듬을 새로 정돈하는 한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어떤 도구로 글을 쓰고 있나요?’라는 질문은, 어쩌면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리듬과 집중을 만들어가고 있나요?’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하루를 통째로 태우는 자전거 롱라이딩은, 글쓰기에 견줄 수 있는 리듬의 감각을 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특별한 경험입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출발해, 해가 떠오르는 순간 길 위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한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몸을 시험하듯 내려쬡니다. 노을이 지며 하늘이 붉게 물들 때에도 페달은 여전히 돌고, 마침내 다시 어둠이 찾아와 가로등 불빛 속을 달릴 때, 그 하루의 모든 시간대가 자전거 위에서 하나의 긴 호흡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긴 호흡은 글쓰기와도 닮았습니다. 롱라이딩이 체력의 지속으로 완성되는 여정이라면, 글쓰기는 집중의 지속으로 완성되는 여정입니다. 구동계가 라이더의 리듬을 잇는 축이라면, 펜과 노트북, 혹은 타자기는 사유의 리듬을 이어주는 도구입니다. 기계가 리듬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듯, 좋은 도구는 생각이 끊기지 않도록 사고의 흐름을 조율해 줍니다.
롱라이딩에서 구동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수십, 수백 킬로미터를 이어가는 동안 라이더의 의지를 도로 위의 추진력으로 바꾸는 축이자, 피로와 지형의 변화에 맞춰 리듬을 세밀하게 조율해주는 기계적 감각기관입니다. 오르막에서는 기어비를 낮춰 에너지를 아끼고, 내리막에서는 손실 없이 속도를 이어줍니다. 제대로 세팅된 구동계는 마치 몸의 일부처럼 반응하며, 페달링의 흐름을 끊김 없이 이어 주는 ‘지속의 기술’이 됩니다.
피로는 쌓여 가지만, 동시에 몸과 기계가 점점 더 하나로 맞물려 간다는 묘한 감각이 찾아옵니다. 땀과 고통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지나는 풍경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변주, 그리고 ‘아직 갈 수 있다’는 작은 의지가 겹겹이 쌓이며 희열로 변합니다. 그 순간 롱라이드는 하루라는 시간을 넘어, 인생 전체를 압축해 보여주는 마법 같습니다.
롱라이딩 이야기가 나온김에 얼마 전에 본 애니메이션 『롱 라이더스(ろんぐらいだぁすと ー り ー ず!)』이야기도 같이 함께 해볼까 합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대학 시절 만화동아리에서부터 즐겨온 취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롱 라이더스나 겁쟁이 페달 같은 작품은 특히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롱 라이더스는 대학 1학년 여주인공이 자전거에 입문해 로드사이클로 기변하고, 투어 대회에 참가하며, 야간 라이딩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이 최종 목표로 자주 이야기하는 ‘파리 대회’는 실제로 브레베라 불리는 장거리 비경쟁 투어를 가리킵니다. 4년마다 열리는 브레베 파리-브레스트-파리(PBP)는 무려 1200km에 이르는 코스를 완주해야 하는데, 이는 ‘란도너스'라 불리는 자전거 문화에서 비롯된 전통 있는 행사입니다. 롱 라이더스는 원래 만화가 미야케가 자신의 란도너스 활동을 바탕으로 만든 동인지 《LONGRIDERS》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정식 연재작으로 발전하면서 일본에서는 ‘롱라이더’라는 일반 명사를 그대로 쓰기 어려워 히라가나 표기를 작품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투르 드 프랑스처럼 전문 선수들이 겨루는 무대가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대회 정도라면 나도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애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주인공들의 브레베 도전기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특히 애니메이션 속 일본 브레베 장면에서는 제한 시간이 비교적 여유로우면서, 중간중간 보급소에서 그 지역의 음식을 즐기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실제보다 과장되게 표현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장거리 주행 속에서 맛보는 지역 음식의 즐거움은 충분히 공감할 만했습니다. [주]
프랑스 전역을 도는 약 3,400km의 투르 드 프랑스, 그리고 파리–브레스트–파리를 왕복하는 1,200km의 파리 브레베 모두 자전거인에게는 꿈같은 무대입니다. 특히 저는 프랑스 전역을 누비는 투르 드 프랑스를 언젠가 꼭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물론 선수로서가 아니라 여행가로서 말입니다. 저의 버킷리스트는 그렇게 또 한 줄 늘어났습니다.
[주] 란도너스(Randonneurs)는 프랑스어로 ‘긴 여정을 떠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사이클 대회처럼 기록이나 경쟁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 완주와 인내를 중시하는 장거리 라이딩 문화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국제 조직인 Audax Club Parisien이 공인하는 브레베(Brevet) 제도가 대표적이며, 200km에서 1,000km까지 다양한 거리를 제한 시간 안에 완주해야 합니다.
성격상 대회라기보다는 인증에 가까우며, 진정한 경험은 기록이 아니라 야간 주행, 비바람, 고립의 순간을 견디며 자기 자신과 맞서는 과정에 있습니다. 란도너스는 ‘경주가 아닌 모험’이라는 철학을 공유하며 전 세계 수많은 동호인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4년마다 열리는 파리-브레스트-파리(Paris–Brest–Paris, 1,200km)는 가장 오래된 장거리 라이딩 이벤트로, 사이클링 역사에서 전설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로드 자전거 문화 속에서 ‘달린다는 것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란도너스는 원래 프랑스에서 시작된 문화이지만, 이제는 한국에서도 점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한강을 출발해 충청 내륙을 관통하거나 동해안을 따라 달려 나가는 브레베 코스들이 매년 열리며, 완주한 이들에게는 국제 인증 메달이 주어집니다. 참가자들은 스스로를 ‘랜도너’라고 부르며, 경쟁이 아닌 자기와의 약속을 지켜내는 데 집중합니다. 특히 한국의 코스는 산악 구간과 도심을 함께 통과하는 경우가 많아 해외보다 더 극적인 고저차와 예기치 못한 기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완주는 단순한 취미 활동을 넘어, 몸과 마음을 동시에 시험하는 하나의 의식처럼 여겨집니다. 보다 구체적인 일정과 활동은 한국 란도너스 공식 웹사이트(korearandonneurs.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언급한 ‘일본 브레베’는 자전거 장거리 비경쟁 라이딩인 랜도너링(Randonneuring)을 일본에서 경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브레베(Brevet)는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행사로, 경기라기보다는 ‘인증 주행’에 가깝습니다. 참가자는 중간 지점에서 영수증이나 사진을 통해 통과를 인증해야 하며, 보급 역시 편의점이나 상점에서 직접 해결해야 합니다.
후쿠오카의 도자기 마을을 달리는 200km 코스, 이즈의 오렌지 센터를 배경으로 한 300km 코스 등 다양한 코스가 운영되며, 일본 특유의 교통 문화와 풍경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참가를 원한다면 일본이나 한국의 랜도너스 클럽을 통해 일정을 확인하고 신청하면 됩니다. 일본 브레베는 장거리 라이딩의 성취감뿐 아니라, 그 길 위에 겹쳐진 지역의 풍경과 문화까지 함께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 본 스케치는 로드 자전거 애니메이션 『롱라이더스! (Long Riders!)』 의 한 장면을 참고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원작자 및 저작권자에게 사전 허락을 받지 않은 참고용 창작물이며, 상업적 목적이 아닌 에세이적 맥락 속에서 ‘함께 달리는 순간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보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원 저작물의 모든 권리는 원작자 및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