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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로드 자전거는 발칙한 욕망을 담게 되었을까

하이테크와 허벅지 사이, 우리 시대의 욕망을 탐구하다

by STUDIO 명랑


1. 묵직한 희열에 매료된 한 라이더의 발칙한 애정 고백

"몸의 모든 감각이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는 순간, 그 감각을 ‘묵직한 희열’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쿵쾅거립니다. 귓속에는 심장 박동과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폭풍처럼 몰아칩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정반대입니다. 평택저수지로 이어지는 새벽 자전거길은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하고, 시야를 가로막는 건물이 없어 끝없는 평야와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가 시선을 가득 채웁니다. 멀리서 본다면,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달려가는 로드 자전거의 모습은 그저 평온한 풍경일 뿐입니다. [주 1]


하지만 그 고요의 중심에서 내 몸은 엔진처럼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호흡은 점점 짧아지고, 맥박은 빠르게 치솟습니다. 그 와중에도 자전거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해냅니다. 정교한 카본으로 만들어진 바퀴는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듯 굴러가며 리듬을 새기고, 정밀하게 맞물린 기어와 체인은 금속성 박자를 더합니다. 기계가 보여주는 완벽한 조화와 달리, 허벅지는 비명을 지르고 땀은 빗물처럼 이마를 타고 흘러내립니다. 그러나 페달은 멈추지 않습니다. 고통과 리듬이 얽혀 묘한 조화를 이루는 그 지점에서, 속도와 풍경, 그리고 내 몸의 세계가 경계 없이 흩어져 하나로 녹아듭니다.


바로 그 고통의 정점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또렷한 각성이 찾아옵니다. 몸의 모든 감각이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는 순간, 그 감각을 ‘묵직한 희열’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로드 자전거라는 세계가 한 라이더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잊을 수 없는 기점입니다.


이 책은 당신도 언젠가 마주할 그 순간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합니다. 기계의 정밀함과 육체의 한계가 맞부딪히며 탄생하는 묘한 감정—그 ‘묵직한 희열’에 매료된 한 라이더의, 조금은 ‘발칙한’ 애정 고백이기도 합니다.


기계의 완벽함과 육체의 한계가 충돌하는 이 역설적인 경험은 비단 외로운 도로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그 아이러니가 곧 우리 시대의 자화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 소박하고 단순해 보이는 행복의 순간들도, 그 이면에는 수많은 노력과 기술, 땀과 눈물, 그리고 보이지 않는 구조가 정교하게 맞물려 굴러갑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갖췄느냐’가 아니라, 그 기술로 ‘단순하지만 충분한 만족’을 얼마나 또렷하게 구현해 내느냐입니다. 우리는 복잡한 디지털 기기들로부터 벗어나 여유로운 삶을 꿈꾸면서도, 최신 스마트폰의 출시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말하면서도 수많은 기능이 탑재된 가전제품에 지갑을 열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자연을 고해상도 카메라로 담아내려 합니다.


이러한 모순은 현대 사회의 본질적인 긴장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기술이 주는 가능성을 놓지 못한 채, 그 복잡함과 의존성 속에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충분함’의 기준을 묻고 바꾸며, 단순함과 정교함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균형을 찾아 헤매는 것—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아닐까요?


로드 자전거를 고르는 일 앞에서 이 생각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구동계 무게는 그램(g) 단위로 줄어드는데, 가격은 킬로그램(kg) 단위로 체감된다”—농담 같지만 이 세계에선 지독히 현실적인 문장입니다. 몇 그램을 덜어내기 위해 수백만 원을 태웁니다. 과연 그 차이를 매번 체감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단지 더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성능을 넘어선 무언가, 곧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불안을 달래 주는 안도감, 가능성과 통제감을 약속하는 여분의 성능이라는 완충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술과 감각, 선택과 태도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 평택 자전거길은 한강 남쪽의 분주한 교외를 지나 남쪽 평야로 이어지는, 도시와 자연의 경계가 만나는 길입니다. 서울과 수도권의 빠른 리듬이 점차 느려지며, 바람의 속도가 처음으로 ‘공기’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길은 안성천 또는 오산천과 진위천, 그리고 평택호 자전거길로 이어지며, 남으로 내려갈수록 풍경의 밀도가 옅어집니다. 논 사이를 가로지르는 자전거길 위로 낮은 구름이 깔리고, 바람은 먼 들녘의 냄새를 실어옵니다. 도심의 구조화된 풍경에서 벗어나, 속도를 낮추고 ‘속도의 방향이 아니라 호흡의 깊이로 나아가는 길’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길의 아름다움은 극적인 장면보다 지속의 미학에 있습니다. 대단한 오르막도, 숨 막히는 뷰포인트도 없지만, 그 대신 멀리 펼쳐진 들판과 강둑, 그리고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반짝이는 자전거 라이트의 행렬이 있습니다. 평택 자전거길은 그렇게 일상의 소음과 욕망을 천천히 비워내며, 라이더를 ‘멈추지 않되, 서두르지 않는 속도’로 이끌어 줍니다.





2. 속도란 숫자가 아닌, 살아 있는 시간의 밀도


인간의 성능에 대한 집착을 이토록 극적으로 보여주는 무대가 또 있을까요? 엔진의 한계, 공기저항, 타이어의 접지력까지—자동차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을 기술의 언어로 구현해 왔습니다. 고성능 스포츠카에서 시작된 경쟁은 이제 평범한 세단까지 번져, 마력과 토크, 제로백 기록을 단 0.1초라도 줄이기 위한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테슬라 모델 S가 0에서 100km/h까지 2초 남짓에 도달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듣는 것만으로도 설렜습니다. 문제는, 정작 현실의 도로에서는 그 성능을 꺼내 쓸 기회조차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 차의 속도계에도 300km/h라는 숫자가 당당히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신호등 앞에 멈춰 설 때마다, 그 숫자들은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BMW M3나 메르세데스 AMG 같은 고성능 세단이 지닌 잠재력 역시 대부분의 경우 서킷이라는 비현실적 무대에서만 온전히 발휘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잠재력’에 기꺼이 돈을 지불합니다.


저도 한때 그 잠재력에 매혹된 사람이었습니다. 밤이면 유튜브에 올라온 자동차 콘텐츠를 끝도 없이 찾아보곤 했습니다. 괴물 같은 엔진 소리와 계기판의 바늘이 순식간에 치솟는 장면을 보며, 언젠가 저 차를 직접 몰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잠을 설친 적도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드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전혀 다른 감각을 마주합니다. 땀이 눈으로 흘러내리고, 허벅지는 불타는 듯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페달을 밟자, 속도계는 어느새 40km/h를 넘어 있었습니다. 변변한 표지판 하나 없는 길이었지만, 그 순간은 마치 작은 서킷 같았습니다. 차창 너머로는 결코 느낄 수 없던 노면의 울림이 손끝과 허리에 전해졌습니다. 속도계 숫자는 초라했지만, 제 몸은 그 어떤 스포츠카를 만났을 때보다 뜨거웠습니다. 느리지만 더 생생하고, 숫자보다 더 강렬한 속도의 실체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스포츠카의 속도계에 갇힌 잠재력보다, 자전거 위에서의 40km/h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살아 있었습니다. 차창 밖 풍경과 격리된 속도의 감각도, 천천히 걷는 산책의 느린 시간의 평온함도, 결국 제 근육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만들어낸 ‘내 몸으로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 앞에서는 빛이 바랬습니다. [주 2]


그래서 저는 속도의 정의를 이렇게 고쳐 말하고 싶습니다.


― 속도란 숫자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시간의 밀도'다.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우리 안의 발칙한 욕망을 끌어올리고, 결국 지갑까지 열게 만드는 것.


숫자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감각, 그 실체를 다시 맛보고 싶은 욕망 ―

그것이 바로 로드 자전거입니다.



[2] 로드 자전거에서의 속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처음 로드를 타던 시절, 시속 20km정도가 목표였습니다. 하이브리드나 시티 자전거에서는 거의 최고 속도에 가까운 수치죠. 결코 빠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달리면 그 숫자는 곧 의미를 잃습니다. 도로의 미세한 요철이 손끝으로 전해지고, 도시의 소음은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속도란 ‘빠름’이 아니라, 몸이 세상과 가까워지는 감각이라는 것을요.


시간이 지나자 속도는 결과가 아니라 기술이 되었습니다. 바람의 방향을 읽고, 상체를 낮추며, 케이던스를 일정하게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속도를 높인다는 건 더 세게 밟는 일이 아니라, 허리와 허벅지의 묵직한 압박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압박이 깊어질수록 근육은 단단해졌고, 그 안에서 미세한 리듬이 생겼습니다. 고통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박자가 되었습니다. 몸과 기계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일 때, 속도는 숫자가 아니라 호흡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얼마나 빨리 가는가’보다 ‘어떻게 가는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몸이 기술을 익혀갈수록, 시속 30km, 때로는 40km까지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그 세계는 단순히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살아있는 순간들이었습니다.





3. 이제, 저와 함께 이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었나요?


우리는 단순함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면서도, 정작 그 단순함에 이르기 위해 또 다른 복잡함을 불러들이곤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함은 가장 복잡한 길 끝에서야 겨우 마주치는, 그러기에 더 아득한 목표가 되어버립니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을 빌려, 『철학의 위안(부제: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에서 인간이 진정한 쾌락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채 무의미한 집착과 헛된 희생 속에서 삶을 소모하며 결국 평온을 잃어버린다고 지적합니다.


이 역설적인 사유의 밑바탕에는 루크레티우스가 말한 세계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에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시의 언어로 풀어낸 철학자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수한 원자들이 충돌하고,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편차(clinamen) 속에서 스스로 태어납니다. 이 편차란 완벽한 직선 운동에서 아주 미세하게 빗나가는 움직임으로, 그 작은 비틀림이 곧 자유의 기원이자 존재의 가능성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만약 원자들이 직선으로만 떨어진다면, 아무것도 서로 만날 수 없을 것이고, 아무것도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이 사유는 인간의 쾌락을 넘어, 오히려 로드 자전거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완벽히 통제된 직선 위에서는 아무것도 서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곳에는 새로운 의미도,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도로의 미세한 요철, 예기치 않은 바람의 방향, 코너에서의 미묘한 흔들림이 만들어내는 그 작은 편차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속도와 균형이 만들어내는 질서 속에서도, 언제나 그 질서를 깨뜨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가 말한 세계의 원리는 바로 그곳, 길 위에서—우리의 몸과 바퀴 사이에서 되살아납니다.


질서와 편차가 만나는 그 틈—우리가 다시 속도를 꿈꾸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토록 완벽과 불완전의 경계를 달리고자 할까요?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로드 자전거라는 작은 기계를 통해 기술과 인간, 그리고 욕망의 관계를 더듬어보려 합니다.


드 자전거가 품은 기술과 욕망의 결은 결국 한 사람의 경험 속에서 비로소 살아납니다. 숫자와 스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페달 위에서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죠. 저 역시 처음 로드 자전거에 빠져들었을 때는 그저 계절을 달리고, 조금 더 멀리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풍경보다 제 자신에게 집중하는 순간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몰입’이라는 감각, 그것은 어느새 삶의 든든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허벅지가 괜히 두꺼워진 건 덤이지만요.


이제, 저와 함께 이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었나요? 우리의 첫 여정은 로드 자전거의 ‘프레임’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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