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상상이 끝나지 않는 공간의 운전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이 있어.
거기에 가면 꼭 휴게소처럼 터널 안에 가게들이 줄지어 먹을 걸 팔고 있다고.”
어릴 적 이모가 했던 이 거짓말을 오래 믿고 자랐다.
“진짜 그런 터널이 있어? 이모가 가 봤어?”
“그럼. 이번에 이모 강릉 다녀왔을 때 있잖아. 그때도 갔는걸.”
터널이 얼마나 길기에 그 안에 가게들이 가득 들어서 있는 걸까.
끝이 없는 어둑어둑한 터널 안에서 빛을 내며 반짝거릴 가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꼭 그 터널에 가보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작고 어렸던 나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달리다 긴 터널을 만나면 한참 멀리서부터 두 눈을 반짝였다.
어떤 터널에는,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터널들은 늘 금방 통과하기 일쑤였고, 그 끝에는 순식간에 밝은 빛이 나왔다.
나의 상상 속 터널 세계는 늘 짧은 순간, 비눗방울처럼 터져 버렸다.
그렇게 어른이 된 나는 마음속 한편에 아직도 터널 속 휴게소가 어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꿈같은 상상을 품고 지냈다.
그렇게 운전을 시작한 후 우연히 국내 최장 터널 1위라는 인제 양양 터널을 가게 되었다.
무려 11km에 달하는 터널. 터널 속 11km가 얼마나 긴 거리인지도 모르고 겁도 없이 터널에 들어섰다.
한없이 가도 끝나지 않는 터널, 저 끝에도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 거기 있었다.
터널 안에 가게들은 없었지만 11km에 달하는 긴 기간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터널 안에는 화려한 조명과 중간중간 달리는 속도에 맞춰 음악이 나왔다.
그 길을 달리다 보면 ‘백두대간 통과 중‘이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그러면 순간 내가 한반도를 큰 산줄기를 달리고 있구나. 하는 현실감이 들면서
긴장된 손으로 운전대를 꽉 움켜쥐게 되었다.
그런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나는 이 터널에서 한 번 졸음운전을 한 적이 있다.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터널만 들어가면 머리가 멍해지는 데다, 장시간 운전이 피로감을 줬던 거다.
정말 깜빡, 1.5초 정도 졸았던 것 같은데 그 순간은 정말이지 아찔했다.
짧은 몇 초였지만 아득히 긴 꿈을 꾸고 온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뺨을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터널을 통과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터널 저 끝에 밝은 빛이 보이지 않았으면 하고.
깜깜한 이 세계에 오래 숨어서, 터널 속 가게가 나오는 그 순간을 계속해서 상상하고 싶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운전자가 된 나는 그 끝에 있는 빛을 얼른 찾고 싶었다.
어릴 적 나에게 마법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들어 주던 터널은
순식간에 운전의 집중력을 집어삼키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혹시, 터널에서 사고가 나거나 불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 한 적 있어?”
“야, 무섭게. 그런 생각을 왜 해…?”
“나는 터널에서 불이 나면 말이야. 제일 먼저 불을 끌 거야. 터널에 보면 소화기들이 1m마다 줄지어 있거든.” 조잘조잘 이런 얘기를 하고 나면 늘 수상한 눈초리를 받지만,
여전히 나에게 터널은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임이 틀림없다.
지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떤 날에는 터널에 들어설 때마다
그 안에, 그리고 그 끝에 내가 모르는 세계가 나올 것만 같다. 그 세계로 달려가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마법 같은 일이 생긴다면, 밝은 빛의 끝에 나오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