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대하여

첫 번째 편지

by hani

하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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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하니 언니.

하니 언니라고 부르니 어색하지만, 라임이 좋아서 또 은근히 괜찮네.

우선 비슷한 듯 달라서 재밌는 서로의 생각을 교환일기로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해 줘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 왜냐하면 이전에 우리가 같이 갔던 경주 여행에서 칵테일바를 갔을 때 ‘사람은 왜 열심히 살려고 하는 걸까?’라는 주제로, 정말 다르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1시간 가까이 나눴던 기억이 나에겐 인상적인 기억들 중 하나거든. 그때 ‘이 언니도 한 생각하는 사람이구만.’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어. 그나저나 팟캐스트는 생애 처음이라 두근거리는데, 걱정보다는 기대감에 대한 두근거림인 것 같아.


자, 그럼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 우리들의 첫 주제는 바로바로 '활동명'에 대한 이야기야. 나는 영인, 언니는 하니라는 이름을 선택했지. 아마 언니가 내 활동명을 보고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 같아. 저건 무슨 의미일까? 내 본명이랑 비슷하지도 않고, 영어이름도 아니고.. 내가 활동명으로 선택한 '영인'이라는 이름은 사실 외할아버지께서 주신 호야. 대학교 선배가 아버지께 받은 호로 작가 활동하는 것을 보고 정말 뜻깊고 멋있다고 느껴졌었어.

그래서 나도 할아버지께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호를 하나 만들어주세요라고 요청드렸지.


여기서 잠깐 호에 대해서 알아보면 좋을 것 같아서 조금만 부연설명할게.

호는 자기 스스로 지을 수 있지만 존경하는 스승님, 가족, 친구 등 특별한 관계의 사람이 지어줬대. 그리고 호는 이름 외의 개성과 정체성을 담는 것이기에, 그 사람의 가치관, 거주지, 추구하는 목표 등을 고려해서 짓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당시에 내 주변의 사람들을 한 번 싹 훑어봤지. 머릿속에 떠올린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면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셨어. 사실 나는 중학생 때쯤에 이미 엄마께 죄송하지만 나의 인생 청사진, 롤모델은 할아버지라고 말했을 정도로 할아버지를 좋아하거든. 그리고 또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시기도 하고. 이렇게 말하면서 생각해 보니 내 인생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주요 인물들 중 한 분이라, 아무래도 나중에 다른 이야기에서도 할아버지에 대해서 종종 말할 것 같네.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할아버지께서는 내 요청을 들으시고는 “알겠다. 심사숙고해 보마.”라고 하시고는 정말 일주일을 넘게 곰곰이 고민하시더라고. 이후에 할아버지께서 호를 지으셨다고 하시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너에게 딱이구나. 영인 어떠니? 영인의 뜻은 항상 구슬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인자하게 산다는 의미란다.”라고 설명해 주셨어.


그 뒤로 할아버지께서 주신 호는 나에게 이전에 사용했던 활동명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 완전히 다른 무게감을 줬어. 뭐랄까.. 호의 의미대로 떳떳하지 못하거나 후회해서 빛나지 못할 일은 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고려가 많아졌어.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내 타고난 성격이 걱정이 너무 많고, 어떨 때는 나 스스로도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다 싶을 정도로 내 눈앞의 것을 챙기는데 조급해지는 면이 있거든. 할아버지께서 이 부분까지 아신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살아보니 이렇게 사는 게 가장 좋더라라는 관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호는 여러모로 나의 부족한 면은 채우고 튀어나온 모난 부분은 살포시 눌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이런 경험이 있다 보니, 내가 새롭게 느낀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이름에는 강한 힘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이건 좀 덩달아서 이해된 부분인데, 부모님들께서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왜 정성스럽게 짓는지에 대한 부분이야. 당연히 자식이니까 소중해서라는 게 첫 번째 이유겠지만,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을 소리이자 '나'를 뜻하는 것이 바로 이름이라는 점까지 생각이 닿더라고. 말하다 보니 약간 좀 너무 깊게 들어가는 느낌인데, 생각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가 않는 영역이네.. 이해해 주길 부탁할게.


정리하자면, 그런 뜻깊은 본명을 두고 요즘 흔히들 말하는 부캐로써의 활동명을 짓는 데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이거지. 하하하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하니'라는 활동명이 어떤 계기와 의미, 기억이 있을지 궁금해. 그리고 언니의 청사진, 롤모델이 되는 인물이 있다면 그분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 주면 좋을 것 같아.

참, 워낙 유명한 시라서 언니도 이미 알 것 같은 시인데 김춘수의 '꽃'을 다시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어. 왜냐하면 그 시에는 이름만이 가지는 정체성, 존재감, 사람 간의 관계가 담겨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야. 어떻게 딱 몇 문장만으로 그 어려운 개념과 의미를 표현했는지.. 시인들은 정말 언어의 마술사 같아.


내가 언니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는 이걸로 마무리할게.


영인 씀.




영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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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에게, 너의 첫 번째 편지를 받고 아주 신선한 느낌이 들었어.

너와 오랜 시간을 알아오고, 그동안 여러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느낌이었달까? 그래서 내내 미소를 띠고 편지를 읽었던 것 같아. 그리고 나 또한 교환일기 제안을 받아준 너에게 정말 많이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 나는 나에 대해 겉으로 드러내는 걸 어색해하고 잘 못하는 성격이라 먼저 이런 제안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데 글쎄, 너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었나 봐. 그리고 만약 네가 거절하더라도, 악의가 없을 거라는 믿음이 전적으로 있기도 했고!


내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네가 들려준 경주 여행 일화가 웃기면서도 기쁘고 신기하고 그랬어. 왜냐하면 사실… 그 칵테일바에서 나눴던 대화,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거든. (그치만 그 칵테일바 진짜 좋았지) 오히려 그날보다, 그다음 날 갔던 경주 대릉원에서 같이 초록빛 능 사이를 걸으며 내가 “와- 정말 평화롭지 않니?”라고 했더니 네가 잔잔한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잠깐의 정적 후 “오… 동그랗다…”라고 했던 기억이 나에게는 더 선명하게 남아 있거든. 그때도 우리의 다름에 대해 다시 한번 느꼈었는데, 같은 여행에서 다른 기억을 인상적으로 남긴 것만 봐도 우리는 참 비슷하면서 다르고 또 그럼에도 같은 것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구나 싶어. 그리고 네가 처음으로 들려준 ‘호’에 대한 설명과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게 읽었어. 가볍게는 알고 있던 개념이지만, ‘호’라는 게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별명이더라고. 그리고 네가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라니, 나도 너에게 새로 생긴 영인이라는 이름을 소중하게 부르고 싶어졌어.


이어서 ‘이름’에 대해서도 이어서 이야기해 보자면, 나는 내 이름, 그러니까 본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이름에 대해 너처럼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오히려 개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며 살았어. 그렇다고 내 이름이 ‘방국봉’처럼 웃기거나 특이한 이름도 아니잖아?(방국봉씨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이름이 싫었던 이유는, 부모님이 붙여주신 이름에 대한 뜻 때문이었어. 흔히 모태신앙이라고 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던 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 였거든. 어떻게 보면 신의 은총이라는 뜻이니까 엄청난 의미를 지닌 이름이지. 그런데 나는 이 은혜라는 뜻이 너무 싫었어. 살면서 내가 노력한 모든 것이 ‘나’라는 사람의 의지나 성과가 아니라 모두 신의 은혜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거든. 뭐랄까, 나에게는 이름의 의미가 너무 커서 나라는 사람이 이름에 먹히는 느낌이었어.


어떤 사람들은 법적인 개명을 하지는 않지만, 새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겠다는 마음에서 친구들끼리나 모임에서만 불리는 자신만의 이름을 짓기도 하더라. 유명인 중에서는 책과 관련된 유튜브를 운영하는 김겨울 작가님도 그렇고, ‘전국축제자랑’이라는 책을 쓰신 김혼비 작가님이나, 또 진짜 본인의 이미지와 찰떡같이 잘 맞는 가명을 가진 연예인들도 많잖아. 물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이 지어주신 본명도 소중하지만,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를 가장 잘 알면서도 나를 이끌어갈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기 때문에, 나의 이름을 다시 짓거나 ‘영인’처럼 호를 지어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도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고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뜻깊은 과정인 것 같아. 여기서 ‘간직하고’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이름을 지어준 분도 중요하지만, 그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도 유연하고 수용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야. ‘호’를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부족한 면까지 받아들이는 점에서, 정말 내가 좋아하는 너의 모습답다. 싶어서 살짝 고개가 끄덕여졌어.


여전히 나는 내 본명에 큰 애정이 없어. 그래서 활동명을 지을 때도 고민의 과정이 꽤 길었지. 아예 다른 이름을 지어보려고 시도도 했지만, 이미 입에 붙어버린 익숙한 발음이 있어서인지 선뜻 와닿지가 않더라. 그래서 내 이름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자인 가운데 글자인 ‘하’라는 글자만 따 오기로 했어. 한자로 뜻을 풀이하면 ‘노을’이라는 의미를 지닌 글자인데, 내가 노을 지는 하늘을 참 좋아하거든. 노을이 지는 시간에 하늘을 보면 매일 하늘의 색이 다른 것도 좋았고, 도무지 물감으로 표현이 어려운 자연의 색은 매번 큰 감동과 위로를 가져다주었어. 또 마침 친한 친구들이 종종 불러주던 별명이 ‘하니’ 였기에 본명의 ‘하’라는 글자는 그대로 살릴 수 있어서, 그냥 하니로 하자! 가 된 거야. 이 하니라는 이름은 해외여행을 갈 때나 외국인들과 대화할 때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데, 특히나 스타벅스에서 닉네임을 남길 때… 어느 나라던 발음하기 쉬운 이름이라 좋더라고. 이야기하다 보니까 본명의 의미가 너무 싫었던 나는, 의미보다는 가볍고 편하게 불리기 쉬운 이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네. 네가 이야기해 준 김춘추의 ‘꽃’이라는 시에서 이런 문장이 있더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본명인 ‘하은’이던, 활동명으로 지은 ‘하니’이던,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그저 까만 글자일 뿐 큰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 내가 느끼기에 더 편한 이름으로, 가볍게 어디든 날아가서 나의 존재를 많은 곳에 알리고 또 불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영인으로, 하니로, 각자의 삶을 잘 살아내 보자.


하니 씀.




✱ letter from : 하니(@hanisketchbook) / 영인(@cup.of.thoughts_log)

✱ illustration from : 하니(@hanisketc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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