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편지
영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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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 안녕, 나는 지금 아침을 먹으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나는 요즘에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기상 후 7시 수영을 갔다가 작업실로 바로 출근을 해. 그리고 내가 만든 그릭요거트에 블루베리와 견과류를 넣은 한 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지. 그리고 천천히 해야 할 작업들을 시작하는데, 그러다 배가 고프면 사워도우나 식빵 같은 식사빵을 한 두 조각씩 먹기도 해. 빵 끊는 거 도저히 못하겠어… 빵 얘기는 하다 보면 끝이 없으니 여기까지만 할게.
내가 나의 아침 루틴을 왜 이렇게 잔뜩 이야기하냐면 말이야, 요즘 이렇게 규칙적으로 사는 삶이 나에게 점점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있거든. 이런 삶의 리듬 속에서 지내다 보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지에 대한 가치관을 깊게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도 해. 가치관은 나에게 있어서 꽤 중요한 부분인데, 미래로 향할 때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 같은 개념이거든. 그래서 너에게 보내는 편지로 나에게 중요한,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꼭 나누고 싶었어.
사실, 평소의 나는 무겁고 진지한 모습이 보이는걸 조금 경계하는 편이라, 이런 이야기는 친구들과 잘 나누지 않는 편인데 너라면 이런 이야기를 묵묵히 함께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첫 번째 편지에서 이야기했던 경주 칵테일바에서의 “사람은 왜 열심히 사는가”에 대한 대화를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겨준 친구니까 말이지. 아마 가치관도 “왜 열심히 사는가”라는 질문과 비슷한 것 같아. 열심히 사는 것도 각자가 추구하는 어떠한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겠지. 삶의 최종 목적, 그러니까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겠고 또 어떤 것을 가치에 두고 사람들과 지내고, 일을 하는가에 대한 삶의 방식일 수도 있겠어.
우리가 미술치료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수업시간에 내가 ‘감정’ 보다 ‘가치관’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그때는 아직 많이 어렸던 건지… 현재 내가 느끼는 어떤 감정은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고, 그것보다는 가치관을 더 중요하게 탐구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거든. 내가 이런 이야기를 날 선 목소리로 이야기했더니 그때 교수님께서 가치관은 감정보다 상위 개념이기 때문에 감정을 먼저 알아채야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식의 말을 해 주셨던 것 같아. 그때는 그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내가 밀쳐놨던 감정들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왜 감정과 가치관이 순서대로 가야 하는지가 이해가 가더라.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만약 내가 거짓말에 크게 화가 난다면, 정직함이 나에게 중요한 가치인 거고, 작은 무시에도 유난히 속상하고 억울하다면 존중이 중요한 가치인거지.
20대의 나는 ‘진심’이 꽤나 중요한 가치관이었던 사람이었어. 나에게 진심은 모든 것에 솔직하고 할 수 있는 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거였거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진심을 다 하면 상대가 그걸 알아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 이 가치를 감정과 연결시켜 보자면, 나는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대해줬으면 좋겠고, 거짓되거나 형식적인 관계가 지속되면 공허했던 것 같아. 겉치레 같은 관계보다는 진심이 오가는 관계에서 안정감과 든든함이 생겼던 거지. 그런데 그런 공허함이 싫어서 너무 모든 것에 솔직했더니 때로는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관계, 일, 상황에서 실망하고 상처받는 일이 생기더라고. 그때 알게 됐어. 모든 것에 다 솔직하고 친밀한 관계만이 “진짜”라고 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구나. 그리고 정말 주고 싶은 진심이 가득한 커다란 마음이 있으면 한 번에 쏟아주기보다는 조금씩 떼어서 주는 것도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된 거지.
경주의 칵테일바에서 “왜 열심히 사는가”에 대한 대화를 나눴을 때 이야기를 이어서 해 볼게. 그때 내가 했던 이야기와 30대 중반을 살아가는 현재 내가 가지고 사는 가치관은 꽤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어. 나는 다채로운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과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야. 이 또한 감정과 연결해 보자면… 아마 호기심이 너무 크기 때문인 것 같아. 새로운 경험을 마주했을 때 긴장도 되지만 머리에 확- 피가 돌면서 어떻게 헤쳐나가지… 하면서 에너지가 샘솟는다고나 할까? 그 에너지가 정말 즐겁고 소중해서, 다양한 경험을 최대한 많이 하고 싶어.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지만 영상도 만들고, 디자인도 하고, 글도 쓰고, 수영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너랑 이렇게 팟캐스트까지 하자고 한 것도 내 가치관의 영향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 또 하나는 조금 개인적이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거든. 구체적인 이야기는 조금 길어질 것 같아서 나중에 주제가 맞닿으면 다시 이야기해 볼게. 누구나 삶의 모양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나는 유난히 내가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왔기 때문에 이런 나를 받아줄 세상이 필요하고 반대로 나도 그런 사람과, 생각을 포용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더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고, 내 생각이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다면 그 사고를 넓혀 줄 대화와 글이 늘 필요해.
요즘에는 추구미라고도 하던데, 나는 30대 중반이지만… 나이랑 상관없이 핑크색 머리로 염색하고 싶으면 하고! 빨간 체크남방에 테니스치마 입고 싶으면 입고! 스니커즈도 발목이 나가든지 말든지 신고! ㅋㅋㅋ 그렇게 좀 어떤 기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이고 싶어. 그리고 60대 70대가 되어도 새로운 것에 눈이 반짝거리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어. 아, 물론 이 모든 건 굉장히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추구미이고… 현실적인 경제적 추구미는… 지금부터 노력해 보려고 해.. 하하.
영인 너에게 미래로 가는 나침반이 되어주는 가치관은 어떤 건지 궁금해. “나에겐 계획이 있어”라는 느낌으로 착실하게 살아가는 네가 늘 신기했거든. 혹시 이런 사람처럼 되고 싶어!라는 추구미가 있다면 같이 이야기 들려줘도 좋아. 그 사람의 어떤 모습이 너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는지 들으면 또 꽤나 흥미로울 것 같거든!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네.
점심은 또 빵을 먹어야겠어.
그럼 안녕.
하니 씀.
하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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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언니 안녕? 난 요즘 케이팝 데몬헌터스 플리를 들으며 할 일을 하는데, 지금 답장을 쓰면서는 ‘Free’라는 노래를 듣고 있어.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끼면서 1화 때보다는 조금 더 자연스럽고 진짜 나의 말이 담길 수 있도록 해보려는 중이야. 아마 ‘트집 잡히지 않을 완벽함’을 추구하던 10대, 20대의 나는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아. 왜냐하면 언니의 말대로 가치관은 미래로 향할 때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이기 때문에,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되고 나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협과 같은 편한 길을 선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꽤나 엄하게 단련시켰어. 정말 융통성 없는 미련덩어리 같은 청소년 시절이었지. 왜 그러고 살았는지 몰라 정말.
근데 이제는 그래도 좀 나이를 먹었다고 이런 생각도 들어. 나침반은 어디서라도 항상 북쪽을 보여주잖아. 근데 그 북쪽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의 기준일 뿐인 거지. 그러니까 각자의 나침반에는 불변의 가치관이 있되,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면서 최종 목적지가 때론 바뀌기도 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우연히 다양한 여정 경험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근데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맞닥뜨린다는 것이 유의미할지 무의미할지 알 수 없으니까, 이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도 생각해.
그래서 언니의 편지를 읽어보니, 변동과 새로운 경험에 대해서는 호기심보다 경계심을 먼저 갖는 내 입장에서는 언니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의 변화를 캐치하고 실행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 대단하다고 느꼈어. 그리고 언니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알게 된 점이 있는데, 언니에게는 ‘마음을 울리고 성장시켜 주는 경험과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나는 언니가 80대 호호할머니가 되어도, 배우고 싶은 거 다 배우고 입고 싶은 대로 입으며 맘껏 표현하고 경험하며 눈이 반짝이는 할머니가 되길 바라고 또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상상해 봐도 너무 멋진 할머니잖아. 안 그래?
나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요즘의 내가 설정한 가치관은 ‘편안한 신뢰’야. 10,20대 때의 가치관인 ‘트집 잡히지 않을 완벽함’이 사회생활과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연마되면서 좀 더 하이레벨의 가치관으로 진화한 것 같아. 솔직히 난 여전히 완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이제는 이것 때문에 나 스스로를 너무 갈아 넣거나 남에게 그 완벽함을 기대하고 강요하기보다는, 나 스스로 완벽하고 싶은 근본적인 이유와 목표를 찾은 거지. 언니가 스스로를 돌아보듯 나도 나의 과거와 생각들의 흔적을 역추적해보니,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약속이 참 중요하고, 누구든 나를 믿고 이야기해 주고 나를 편하고 든든한 대상으로 느끼길 바랐던 거라는 걸 깨달았어. 그리고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인내심과 성실함이거든? 그래서 나의 이러한 가치관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찾은 게 아닌가 싶어. 언니도 여러 사람들을 보며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으리라 생각해. 오늘 하루 내일 하루가 쌓여서 미래의 내가 되듯, 신뢰도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쌓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한편으로는 그 수많은 하루가 쌓인 축적물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게 신뢰이기도 해서 더 탄탄하게 다듬어야 한다는 압박도 있어. 가끔은 피로감이 크지만, 아직 나는 그저 착실하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외에는 신뢰를 쌓는 다른 방법을 모르겠어.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면, 너무 알고 싶다. 정말 다른 방법을 못 찾는다면, 내가 더 나이 들어서 ‘편안한 신뢰’의 새로운 상위 버전을 발견하길 바랄 뿐이야. ㅋㅋㅋ
그리고 나의 가치관이라는 나침반으로 도달하고 싶은 최종적인 인생 종착지는 ‘호상’이야. 난 정말 진지하고 진심인 인생 목표인데, 처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으잉? 하는 반응을 보이더라고. 내가 열심히 살고, 배우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정말로 ‘호상’때문이거든. 나중에 마지막 날을 보낼 나는 부디 따뜻한 집에서, 라테 한잔 만들어 마시고, 낮잠을 자다가 정말 후회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이후에 다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영인은 참 괜찮은 사람이었어.”라고 이야기해 주길 바라. 정말 솔직히는 내 장례식비용도 다 내가 직접 내고 가고 싶어. 왜냐하면 우리 증조할머니께서는 다른 가족들 아무도 모르게 의대생들의 해부 실습을 위해 본인의 시신 기증을 신청하셨고, 요양원에 장례비용까지 미리 다 지불을 하셨거든. 가족들에게 마지막 식사까지 주신거지.. 참.. 다들 정말 감탄을 했고 나에게 증조할머니의 장례식장은 이별에 대한 슬픔도 있었지만 경외와 감탄이 더 컸던 느낌이 강하게 남아있어. 여하튼 이걸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재산이 필요할 테니, 경제적인 준비도 더 열심히 해야겠지.. 하.. 이게 정말 너무 어렵지만 뭐 어떡해. 어떻게든 해내야지. ㅋㅋㅋㅋ
야행성 인간이라 이걸 쓰다 보니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겼네.
슬슬 편지를 마무리하고 내일을 위해 잘 준비를 해야겠어.
왜냐하면 고양이 테리가 눈은 끔뻑끔뻑 뜨면서 언제 잘 거냐고 쳐다보고 있거든.
그럼 이만.
영인 씀
✱ letter from : 하니(@hanisketchbook) / 영인(@cup.of.thoughts_log)
✱ illustration from : 하니(@hanisketch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