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와인한잔 디지털 펜팔 캠페인 <오늘, 하루>
‘구조적으로 예쁜’ 아이디어
구조적으로 예쁘다는 말은 회의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보통 브랜드 메시지와 아이디어의 연관성이 높을 때, 소비자 경험 과정에서 각각의 단계가 명확한 목적성이 있을 때 사용한다. 이렇게 대부분은 좋은 뜻으로 쓰이지만, 구조적으로 예쁜 것에 집착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복잡해지기도 한다.
예쁜 아이디어에 속지 말자
캠페인의 모든 과정을 우리의 의도대로 즐겨 주는 너그러운 소비자는 없다고 가정하고 아이디어를 기획한다. 당장 내가 소비자일 때에도 그러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쉬운 아이디어를 지향한다. 구조적인 완성도는, 쉽다는 전제를 만족한 뒤에 채워가는 것이 우리의 방향성이다.
나의 하루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오늘, 와인한잔은 저렴한 가격에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주점 브랜드로, 브랜드 가치로 ‘위로’를 내세우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서로의 일상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한 말이 오고 가는’” 공간을 지향하고, “와인은 수단일 뿐, 진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시간”이라는 신념을 가진 브랜드이다. 저가형 와인 매장에서 위로라는 감성적인 가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네온이 번쩍이는 공간 이상으로 독특한 경험이 필요해 보였다. 우리는 브랜드의 일방적인 말보다는 이용자 간 소통을 통해 위로라는 가치를 전할 수는 없을지 고민했다. 오늘, 와인한잔의 고객이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로를 하세요”가 아닌 “하루를 공유하세요”
나는 스무 살에 재수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은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모 교회에서 사람들이 학원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뭔가를 나눠주며, 기쁨에 가득 찬 표정으로 “힘내세요!”를 외쳤다. 이해와 배려 없는 위로가 폭력적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최근에는 가수 윤하의 딩고 킬링보이스 영상을 자주 본다. 여기에서 <답을 찾지 못한 날>이라는 곡을 소개하며, 윤하는 “괜찮아, 잘 될 거야”보다 “나도 그래”가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우연히 받아 본 누군가의 하루가 위로가 되지 않을까?
고민을 해결해주는 <마법의 고민 해결책>이라는 것이 있다. 어느 상황에나 조언이 될 만한 묘한 말들이 적힌 책인데, 고민이 있을 때에 아무 페이지나 펴서 거기에 적힌 말을 따르는 식으로 쓰인다. 우리는 오늘, 와인한잔의 고객이 서로가 서로에게 ‘마법의 책’이 되어주길 바랐다. 심각한 진로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는 가벼운 이야기가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우연히도, 마법처럼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랜덤 펜팔을 선택했다.
디지털 펜팔 캠페인 <오늘, 하루>
오늘, 와인한잔 펜팔 캠페인의 이름은 <오늘, 하루>이다. 브랜드명과 브랜드가 시행한 <오늘, 시집>이라는 메뉴판 캠페인의 네이밍을 차용했다. 소비자는 테이블에 놓인 배너의 QR코드를 촬영하고, 연결되는 랜딩 페이지에서 점포를 선택하고 자신의 하루를 적어 보낼 수 있다. 하루를 공유한 소비자는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답장으로 받아볼 수 있다. 답장과 함께 서비스 안주 등 선물이 제공된다.
각자의 이유로 와인을 마시러 온 사람들은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또 누군가의 하루를 답장으로 받아보는 과정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를 통해 “위로가 있는 곳”이라는 오늘, 와인한잔의 브랜드 정체성을 전달한다. 지금 어딘가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는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환상성은 소비자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용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는 캠페인이기에, 발송되는 메시지에 대해 꼼꼼한 검수 과정을 거칠 것임을 명시하며 클라이언트에게 제안서를 발송했다.
새벽 2시 회의는 위험합니다
이 캠페인은 일단 쉽고, 구조적으로도 예쁘다. 브랜드의 주요 소비자층인 2535 여성에게 익숙한 펜팔의 형식을 차용했으며, 아이디어와 브랜드 메시지의 일치도도 높다. 그러나 단계를 추가하여 구조적인 완성도를 높일 여지가 있었고, 여기에 집착하다 보니 쉽다는 장점을 해칠 뻔했다. 처음엔 소비자가 완전히 자유로운 형식으로 하루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양식을 제공하려 했다. 아래 양식처럼 자신의 하루를 공유한 뒤, 메시지를 받아 볼 누군가에게 한마디를 건네도록 하는 것이다.
수신인이 명확한 메시지 교환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최소한 ‘당신은’ 부분을 넣어서 수신인을 명확히 지정하기를 바랐다. 빈칸에 적는 텍스트가 단순한 일기, 독백보다는 질문이나 응원, 취향 추천과 같이 누군가를 대상으로 건네는 말일 때 펜팔의 성격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펜팔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신은’ 뒤에 뭘 써야 할지 모호하다,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 늦은 시간, 회의는 끝나지 않고 논쟁이 계속됐다.
나는 이 부분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뒤에는 "어떤 하루였나요?", "마음 편히 잠들길 바라요"와 같은 말들이 적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수신인이 명확해야 한다는 ‘구조’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메시지의 형식을 정하는 것이 아이디어를 어렵게 만들고, 무엇이든 적어 하루를 공유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의 본질을 해치는 요소라면 없애야 했다. 구조적 완성도가 쉬움에 우선해서는 안 되기에 쉬움을 선택해야 했다. 늦은 시간 회의를 해서인지 판단이 조금 더 늦었던 것 같다. (이후로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회의를 하지 않는다.)
새벽 2시, 긴 논쟁 끝에 우리는 다행히도 둘 중에서 ‘쉬운 아이디어’를 선택했다.
아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
올해 초부터 개인적으로 심리상담을 매주 받고 있다. 그리고 매주,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을 사실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상담에서는 내가 어떤 장점과 단점, 상처와 결함이 있는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지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면 분명 해봤던 생각이고 안다고 생각한 사실이지만, 충분히 체화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을 내 입으로 직접 이야기하고 인정하면서 ‘아는 것’이 ‘하는 것’이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창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브런치에 적는 글에는 작업한 제안서 하나 당 깨달음 하나를 엮어서 적고 있다. EP.00에 적었듯이 “같은 길을 걷는 여러분께 그동안의 배움을 나누”기 위해서도 맞지만, 스스로 배운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작업일지를 적는다. 쉬운 아이디어가 항상 구조적 아름다움에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는 것’이었다. 이제는 잊지 않고 지키는 우리의 규칙이 되었다.
점점 더 나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가 실수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