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메일 <8비트 요소 키우기 캠페인> 제안
현실성이라는 울타리
창의성은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생각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하늘을 날고 시간을 되돌리는 엉뚱한 상상을 하던 어린 시절, 우리는 더 창의적이었을까? 새롭고 독특한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현실성을 챙기다 보면 창의성이 훼손되는 순간이 있다. 현실성은 창의성을 깎는 도구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현실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이디어가 정말로 더 창의적인 광고라고 볼 수 있는지도 모호하다. 창의성이라는 요소는, 결국 현실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광고 관점에서는, 어린 시절보다 현실에 물든 지금이 더 ‘창의적’이다.
그리고 가끔은 조금 허무맹랑하더라도, 구현해보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다. 해본 적이 없어서, 회사의 규모가 작아서, 예산이 많이 들어서 제안하지 못하는 아이디어가 많다. 그중에서도 몇 개는 도전적으로 제안해보기도 한다. 네이버 메일의 UI를 바꾸라고 제안한 이번 제안서가 그렇다.
안읽음 999+
쌓이고 쌓이다 보면 더 손대지 않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나도 얼마간은 깨끗하게 관리했었지만, 언제부턴가 메일함에 읽지 않은 매일이 100개를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안읽음’이 999+가 넘어가는 사람들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메일을 읽지 않는 것이 뭐가 어때서?’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의외로 환경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
모든 메일은 보관할 필요가 없다면 지워주는 것이 좋다. 메일함에 쌓여 있는 이메일 한 통은 약 4g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고 한다. 메일을 보관하는 데이터 센터가 많은 양의 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2013년 기준으로 국내 데이터 센터의 연간 총 전력 사용량은, 원자력발전소의 연간 발전량의 3분의 1에 달한다. 그러나 필요 없는 이메일도 성실히 읽고, 삭제까지 하는 이용자는 거의 없다. 이것이 환경에 이로운 일이라는 것 자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용자가 즐거운 마음으로 직접 메일함을 정리하도록 만들어보기로 했다.
메일함 비우기는 그 자체로 어렵지 않은 일이면서도, 정리를 한다는 실질적인 효용도 있어서 이용자에게 요구해 볼 만한 일이었다. 원래부터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미루고 있었다면, 캠페인은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공한다면 이용자와 환경, 그리고 메일 플랫폼 운영사에게까지 이익이 되는 캠페인이 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클라이언트가 누구인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네이버 메일로 결정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8비트 요소 키우기
귀여운 것과 재미있는 것, ‘사기적’이라고 말할 만큼 모든 경우에 효과적인 요소들이다. 두 가지를 함께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귀여운 것을 키우면서 성취감을 얻도록 하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토스뱅크의 “키워봐요 적금”이 있다. 매주 잊지 않고 저금을 하면 자신이 선택한 동물이 알을 깨고 나와서 최종적으로는 전설의 동물로 자란다. 단순히 이자율과 같은 조건을 넘어 저축하는 재미를 만들어주고, 그 재미의 결과물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소비자의 손에 쥐어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메일을 제때 잘 정리하라고 말하는 것에는 이러한 넛지가 필수적이었다.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버린 이메일이 어딘가에 활용되는 재미를 만들어서, 그 결과물을 소비자에게 안겨주어야 했다. 내가 읽은 메일을 착실히 삭제하면, 어떤 존재가 이것을 먹고 자라는 것은 어떨까? 더 나아가, 메일을 착실히 삭제해주지 않았을 때 이 존재가 시든다면, 없는 메일도 만들어서 삭제하고 싶지 않을까?
8비트 요소 키우기 아이디어는 그렇게 나오게 됐다. 메일 서비스의 휴지통 탭 하단에 꽃, 모닥불, 그리고 고래(네이버 웨일 파이팅!)를 형상화한 8비트 픽셀 캐릭터를 삽입한다. 이용자는 이들 중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고를 수 있다. 메일함에서 다 읽은 메일을 휴지통에 넣으면 꽃이 시들지 않게, 모닥불이 꺼지지 않게, 고래가 굶지 않게 유지할 수 있다. 자신이 고른 캐릭터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게임적인 요소는 메일 삭제를 위한 즐거운 동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의성이 엑셀이면 현실성은 브레이크일까
이 아이디어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넛지이다. 기존에 해왔던 브랜드명 인지 혹은 긍정적 이미지 형성만을 목표로 하던 제안서와는 달랐다.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현실성이 필요할 때에, 그 답은 창의성에 있었다.
창의성이 엑셀이면 현실성이 브레이크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재미있는 것이 떠올라도 현실적으로 만들다 보면 무난해지는 것이 항상 아쉬웠다. 다시 생각해보면 현실성은 브레이크가 아니라 핸들이었다. 둘은 반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요소였다.
무턱대고 달리는 창의성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는 현실성이라는 핸들
제안서는 거절 답변을 받았다. 이 기획은 우리가 실제 집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직접 할 것이 아니라 막 지른 셈일 수도 있다. 이렇게 무지에서 오는 새로움은 창의성일 수도 있지만, 현실성의 제어 없는 무분별한 아이디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더 많은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고, 모르는 분야에 대해 잘 아는 팀원과 함께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게 되면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닌, 현실성이 더해진 아이디어를 내놓는 집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넘치는 창의성에, 적절한 현실성을 더해 제안하는 회사가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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