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110만 원짜리 현실과 44만 원짜리 환상

'확률 0%'의 환급금 vs '성능 100%'의 중고 PC

by 사교육 생각

어제는 아이들을 '대학 가는 기계'로 만드는 세상에 대해 썼다. 입시라는 도살장 앞에 선 열아홉 인생들이 안쓰러워 펜을 들었다. 그런데 글을 발행하고 난 밤 11시, 정작 '기계'가 필요한 건 나였다.


그래서 샀다. 8년 만에, 그것도 당근마켓에서 110만 원을 주고 중고 컴퓨터를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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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X 4070 그래픽카드에 라이젠 5700X CPU, 그리고 2TB의 넉넉한 저장공간. 남들이 보면 "그 돈이면 새 걸 사지"라고 혀를 찰지 모른다. 하지만 수학 강사인 내 머릿속 계산기는 달랐다. 감가상각이 끝난 부품, 검증된 성능, 그리고 앞으로 8년 동안 나에게 줄 '렉 없는 평화'. 이것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내 정신 건강을 위한 최적의 함숫값이었다.


문제는 결제 버튼을 누른 뒤에 찾아온 묘한 죄책감이었다. 1억을 모으겠다고 짠테크를 하고, 가성비를 따지던 내가 고작 게임 좀 하겠다고 110만 원을 태워? 이게 맞나? 이성이 감정을 이기지 못해 쭈굴 해져 있을 때, 스마트폰이 징 하고 울렸다.


[X스] 숨은 환급금 440,000원을 찾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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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번쩍 뜨였다. 44만 원? 110만 원의 40%다. 이 돈이면 내가 방금 지른 컴퓨터 값의 5분의 2를 메울 수 있다. 그래, 하늘이 내 소비를 용서하시는구나. 죄책감이 순식간에 기대감으로 치환되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수수료를 7만 원이나 달란다. 배보다 배꼽이 너무 크지 않은가? 직업병이 도졌다. 수학 강사가 숫자 놀음에 당할쏘냐. "내가 직접 홈택스 들어가서 신고하고 만다." 호기롭게 경정청구 화면을 띄웠다. 2021년, 2022년 소득 자료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결과는? '0원'이었다. 당시 나는 소득이 적어 이미 낼 세금이 거의 없었고, 원천징수된 세금마저 싹 다 돌려받은 상태였다. 털어서 나올 먼지조차 없는 지갑이었다는 소리다. X스의 그 알림은 내 과거 데이터에 0.1%의 가능성만 있어도 일단 던지고 보는, 일종의 '확률 낚시'였다.


허탈했다. 7만 원 수수료를 내고 대행을 맡겼다면, 환급은커녕 "환급액 없음"이라는 통지서만 비싸게 샀을 뻔했다. 44만 원이라는 숫자는 내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이었고, 플랫폼이 던진 미끼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입시판이나 여기나 다를 게 없다. "네 성적이면 인서울 가능해", "이 전형이면 뒤집을 수 있어". 학원가와 컨설팅 업체들이 학부모들에게 던지는 그 달콤한 말들도 사실은 X스의 알림과 비슷하다. 희박한 가능성을 마치 '확정된 미래'인 것처럼 포장해 수수료를 챙긴다. 그 희망 고문에 낚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허공에 뿌려대고 있는가.


화면을 끄고 책상 아래 웅장하게 돌아가는 컴퓨터를 봤다. 팬 소음은 정숙했고, 모니터 속 화질은 선명했다. 이 110만 원짜리 중고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입력한 만큼 반응하고, 스펙만큼의 성능을 100% 확률로 보여준다. 수수료도, 희망 고문도 없다.


44만 원의 환상을 좇느라 에너지를 쓰는 대신, 나는 110만 원짜리 확실한 현실을 택하기로 했다. 세상은 변수로 가득 차 있다. 아이들의 입시도, 나의 재테크도, 내일의 주가도 온통 알 수 없는 확률투성이다. 그 불안한 세상 속에서, 적어도 내가 퇴근하고 앉을 이 반 평짜리 책상 위만큼은 '상수(Constant)'이길 바랐다.

어쩌면 내가 산 건 게임기가 아니라,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은 죄책감 없이 게임을 켜야겠다. 나는 기계가 아니지만, 내 기계는 나를 배신하지 않으니까. 세상의 모든 '확률 낚시'에 지친 여러분에게도, 확실한 위로가 되는 '상수'가 하나쯤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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