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만 원짜리 중고 컴퓨터의 '윈도우'가 내게 가르쳐준 것
지난밤, 우여곡절 끝에 내 책상 위에 안착한 110만 원짜리 중고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분명 최신 운영체제인 '윈도우 11'이라고 했는데, 뭔가 달랐다.
바탕화면이 너무나 고요했다. 으레 보여야 할 뉴스 속보 팝업도, 체험판 백신 프로그램의 경고창도, 심지어 시작 메뉴를 누르면 현란하게 춤추던 '캔디 크러쉬 사가'나 '틱톡' 아이콘도 없었다. 오직 휴지통 아이콘 하나와, 작업에 필요한 필수 폴더들뿐.
판매자에게 물어보니 'LTSC (Long-Term Servicing Channel)' 버전이라고 했다. 주로 기업이나 관공서, 혹은 특수 목적으로 사용되는 버전으로, 윈도우의 핵심 기능만 남기고 잡다한 앱과 광고, 강제 업데이트 기능을 모조리 '뺀' 버전이란다. 쉽게 말해, 공부에 방해되는 만화책, 장난감, 게임기를 싹 다 치워버린 '독서실 같은 윈도우'인 셈이다.
이 텅 빈 화면을 보는데, 기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씁쓸한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수학을 가르친다. 칠판 앞에서 아이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소거(elimination)'다. 복잡한 식을 풀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항을 지워내고, 공통된 인수를 묶어내어 식을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문제의 본질이 보이고 해답이 나온다.
그런데 정작 우리네 삶은, 그리고 아이들의 입시판은 '뺄셈'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불안하니까 더한다. 국영수만으로는 불안해서 코딩을 더하고, 그걸로는 부족해 보여서 봉사활동을 더하고, 다시 제2외국어를 더한다. 스마트폰 앱도 마찬가지다. 메신저 하나를 깔았을 뿐인데 쇼핑 탭이 붙고, 송금 기능이 붙고, 뉴스 피드가 붙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은 자꾸 내 시야에 무언가를 '설치(Install)'하려고 안달이다.
마치 윈도우 'Home' 버전 같다. 사용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런 것도 있으니 한번 써봐", "이 뉴스는 꼭 봐야 해"라며 리소스를 잡아먹고 주의를 분산시킨다. 덕분에 컴퓨터는 느려지고, 사람의 뇌는 과부하에 걸린다.
그런데 이 투박한 중고 PC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운영체제입니까, 아니면 광고판입니까?" LTSC 윈도우는 묵묵히 묻는다. 그리고 과감하게 덜어냈다. 남들이 화려한 기능을 덕지덕지 붙일 때, 이 녀석은 오직 '구동'이라는 본질에만 집중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8년 만에 바꾼 하드웨어의 성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소프트웨어의 가벼움이 주는 쾌적함이 더 컸다. 클릭하면 즉시 뜬다. 부팅 직후에도 버벅거림이 없다. 백그라운드에서 몰래 돌아가는 감시 프로그램이 없으니, 내가 온전히 이 기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화려하지 않지만 강력하다. 이것은 '결핍'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최적화'였다.
문득, 내 삶에도 'LTSC 패치'가 필요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38살의 나. 노후 준비라는 명목의 불안, 남들만큼 살아야 한다는 체면, 뒤처지면 안 된다는 조바심... 이런 '블로트웨어(Bloatware: 불필요한 소프트웨어)'들이 내 인생의 램(RAM)을 얼마나 잡아먹고 있을까. 정작 내가 집중해야 할 '나의 행복', '나의 가족', '나의 휴식'이라는 프로세스는 뒷전으로 밀려나, 버벅거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학원 하나를 '더' 등록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멍하니 창밖을 볼 수 있는 시간, 푹 잠들 수 있는 시간을 위해 불필요한 스케줄을 '빼' 주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110만 원을 주고 산 건 RTX 4070이라는 그래픽카드였지만, 덤으로 얻은 건 '뺄셈의 미학'이었다. 화면 구석의 휴지통 아이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내일은 내 인생에서, 그리고 제자들이 느낄 고민에서 무엇을 좀 '삭제(Uninstall)' 해볼까.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 아무것도 없는 이 텅 빈 바탕화면이 참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