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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외] 쉽지 않다는 말

나이가 들수록 많이 쓰게 되는 말

by j kim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가 '쉽지 않다'라는 말이다. 어려우면 어려운 거지 왜 쉽지 않다는 말을 이리도 많이 쓰게 됐을까?


어렵다는 말은 왠지 내가 그 일을 못한다는 말인 것 같아서 정말 쓰기 싫더라. 그런데 '쉽지 않다'는 말은 주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잘 해냈다'라는 식의 느낌을 주고 싶어 즐겨 사용하게 된다. 예를 들면, 교감 선생님 이 일 정말 쉽지 않아요. 이 말은 '내 능력이 부족해서 힘들어서 못한다는 이야기도 아닌 동시에 어려운 일인데 저라면 잘 할 수 있습니다' 정도의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쉽지 않다'는 말을 내 주변에서는 많이 사용하고들 있는 듯 하다. 특히나 내가 현재 처해있는 위치가 직장에서 여러 가지 업무를 전담하는 역할이니 만큼 어려워서 못하겠다는 투의 말은 적절치 못한데다 그렇다고 내 노력과 능력이 빛을 바라게 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인지라 어느정도 생색 내지는 뽐내는 것을 목적으로 자주 사용하다 보니 이 '쉽지 않다'라는 말이 평소에도 입에 붙어 자주 사용하게 되어버렸다.


자주 사용하게 된 연유는 이런 까닭에서였는데 정말 마음에 안들게도 이 말을 진심으로 사용하는 상황이 점점 늘어나게 되고 있어 심히 안타깝다. 특히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째서인지 어릴때보다 쉽지 않은 일들이 투성이로 늘어나는지 아쉬운 마음만 들게 된다. 단적으로 불과 8년전만 하더라도 밤새서 술을 마시고 첫차를 타고 집에 가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또,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말을 놓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체면 생각하지 않고 까불면서 노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뭔가 하는 것도 지금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재미있게 노는 것도, 안주없이 소주 한두병에 취해서 친구와 인생얘기를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영화를 하루 종일 여러편씩 몰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좋아하는 뮤지션의 앨범을 통째로 집중해서 듣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혼자서 영화관에 가는 것도, 혼자 술을 마시러 단골 바에 가는 것도, 심지어 라이브 클럽이나 공연을 혼자 가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때 제 취향은 분명히 펑크록이라면서 내 취향과 성향에 대해 오타쿠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것들이 그때보다 훨씬 귀찮아짐과 동시에 그럴만한 체력도 충분하지 않은 듯 하다. 안타깝게도 체력이 부족해진 것 만큼 열정도 부족해졌음이 분명하다.


반면에 과거보다 쉬워진 일들도 분명히 많기는 하다. 그게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지금은 내가 못하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내는 나보다 어린 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야 그래도 나는 니네가 어려워하는 이런 일은 쉽게 하고 있잖니'라는 느낌으로 뻐기는 식으로 종종 이야기하고는 한다. 과거와 비교해서지만 예를 들어, 예전에는 일년에 한두번 기념일에나 마시던 비싼 술을 마시는 일은 어렵지 않다. 자비로 세계 각지로 한달씩 여행갔다오는 것도 어렵지 않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럴듯한 호텔에 가서 친구 혹은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차를 끌고 다니며 이곳 저곳 내맘대로 나의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르신들과 생각보다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의견을 공유하는 일이 예전보다 어렵지 않다. 법적인 절차나 직장의 업무 그리고 금융 관련 일을 해결하고 처리하는 데에 예전보다 훨씬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알아보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다.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가족이나 가정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어렵지 않다. 등등 내가 어렸을 때는 자연스럽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어렵지 않게 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데, 가슴이 쓰리게도 이런 일들은 나이가 들면 경험에 의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일들이라거나 혹은 직장을 가지게 되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가능해지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어릴 적 내가 지금의 나정도 되는 형들을 보며 '와 저 형 멋있다.'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저 비교적 쉽게 얻어지는 경험들과 누적된 시간의 산물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30대가 넘은 나에게는 가슴을 후벼파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올 따름이다.


사실 '쉽지 않다'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근래 들어 가장 적합한 표현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이보다 적합한 표현은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표현이 떠올랐다. '사람 구실 하기가 쉽지 않다.' 이 말은 '1인분 하기 쉽지 않다.' '~~ 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인데, 참으로 재미있는 건 이게 정말 표현만 놓고 보자면 그렇게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 구실' 하는 것이 대체 왜 그렇게 쉽지 않을까? '1인분'하는 건 보통만 하면 되는 거 아니던가? 나도 사실 예전에는 이런 일을 쉽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회, 가정, 직장, 친구들 사이에서 사람 구실 하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1인분 하기가 어찌나 '쉽지 않은'지. 예전 우리 어머님이 제발 남들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 말씀이셨는지 '남들 만큼'이라는 말씀에는 엄청난 욕심이 숨어있었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사회적으로 기대라는 것을 받으며 살아간다. 물론 그 기대치가 제로인 사람도 있는데다, 반드시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될 의무나 필요도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 기대치를 반드시 충족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그 '사람 구실'이라는 게 절대로 일반적인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엄마 서운하지 않게 엄마 친구 아들만큼 용돈도 드려야지. 직장에서는 상사가 다른 직원이랑 비교하면서 욕하지 않을 정도로 일하면서, 선배로서 깍듯하게 대우도 해드려야지. 각종 모임에서도 적당히 의견도 내며 구성원으로서 활동해야지. 우리가 신경쓰고 해야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포기하기에는 우리의 욕심도 너무나도 많고, 주변의 기대도 너무나도 크다. 우리가 무너지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이 너무나도 많이 생겨버렸다.


한 가정의 아들이나 딸로서 산다는 것, 직장에서는 빵꾸가 안 날 정도로 1인분의 역할을 하는 것,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로서 연인에게는 친구의 남친이나 여친과 비교해서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남친/여친 역할을 하는 것, 사회적으로는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한명의 구성원으로서 성숙한 시민 역할을 하는 것 등등. 우리는 생각보다 맡고 있는 역할이 너무나도 많은 삶을 살고 있다. 지금보다 과거에는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을 지금보다 쉽게 했던 그 때에는 사실은 지금보다 맡고 있는 '역할'이 훨씬 적어서 '사람구실'할 일이 훨씬 적었을 따름이다. 누군가가 내가 해야할 역할을 대신 해주고 있었고 이것 저것 신경쓸 필요가 없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내가 쓰고 싶은 시간을 완연하게 투자할 에너지가 충분했던 것 뿐이었다. '절대' 지금의 내가 열정이나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곳이 더 늘어났을 뿐이다.


나는 그때가 너무나 그립고 그립다. 어떤 것에도 의무적으로 내 소중한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었던 그 때. 내가 원하는 것을 골라서 할 수 있을 만큼 시간과 에너지가 충분했던 그 때가 그립다. 물론 사람구실하며 '남들만큼 괜찮은' 남편노릇하며 '평범한' 아들노릇하며 사는 나 자신도 기특하고 예쁘고 자랑스럽지만 남들보다 조금은 못났어도 특별하게 못났던, 다른 색깔로 못났던, 어떤 면에서는 지금 하기에는 오히려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냈던 어릴 적의 내가 그립기도 하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쉽지 않은' 일들 투성이지만 앞으로는 좀 더 '어렵지 않아지길' 바라며 사람 구실하기 위해 '쉽지 않은' 일들을 해나가는 우리들을 칭찬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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