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던 초록의 빛무리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유일한 길잡이인 작은 점이 사라질까 달리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바닥을 딛고 땅을 박차는 감각이 반가워 무중력 장치를 가동하는 것도 잊었다. 공간은 오직 바닥을 딛는 울림과 이플의 가쁜 숨소리로 채워졌다. 저 빛을 움켜쥐고 벗어나자. 흐르는 땀방울과 피부 표면에서 기회한 식은 액체의 감각에 온몸이 달아오른다. 이 열기는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위협일까.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날아간 불빛은 이내 큰 소리와 함께 폭발해 두개골을 강타하고 곧 산소를 잡아먹었다. 여기까지 와서 굴러다니는 산소 소거 장치 하나 피해내지 못하다니. 큰 폭발로 제 존재를 알렸으니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조각난 발목을 질질 끌며 가까이 가자 그림과 똑같은 더미가 있다. 큐비클의 바닥에는 성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더미의 하반신 도면과 허울뿐인 글귀, Post mortem pax (죽음 이후의 평화). 큐비클에 손을 대자 더미의 투명한 피부가 반짝이며 반응한다. 무언가 오래 잠들어 있던 그를 활성화시켰는지 빛무리는 과격하게 나부끼며 날뛰었고, 동시에 관자놀이와 안구가 짓눌리는 고통에 주저앉는다. 안압이 치솟고 오래된 흉터들마저 벌어지며 피가 맺혔다. 빠르게 무너지는 몸의 균형은 남은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었다. 더미 쪽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핵분열도 견딘다더니 폭발 한 번에 부서진 틈으로 외부 공기가 유입되며 시커먼 화학 작용이 가속된다.
쾅
큐비클 내에서 터진 연기가 새어 나와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가열된 공기의 밀도는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이플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시야에 흐릿하게 띄워져 있던 라이브 보드가 사라지며 더 이상의 신체 과부하를 막기 위해 전력 또한 차단되었다. 연이은 폭발, 그리고 급격히 고갈되는 산소로 이플의 반쪽자리 몸마저 서서히 시들어간다.
이쯤에서 습관처럼 예측 모델을 띄워 자신의 미래를 점쳐 본다.
리스크 한계 초과 — 임무 수행 불가 — 시스템 자동 전송
손상 속도 측정 불가
신체 훼손율 93.5%
생존 확률 7.2프로
여전히 이플의 생존 확률은 후하다. 완전히 꺾여버리는 무릎에 프릿으로 땅을 딛고 버티던 순간, 가득 찬 독성 산소를 헤치고 누군가 다가와 이플을 부축한다. 방독면을 낀 일립이었다. 가려진 눈이 마주치자 알 수 있었다. 처음 도시에 왔을 때 그녀에게 말을 건 보안관 차림의 남자였다. 왜 이제 깨달았을까. 아버지나 친척 따위가 아닌 본인이었다. 그를 잡아 족치는 건 조금 미루기로 했다. 폐가 반쯤 타는 고통에 당장 일립의 존재도 환영이 아닐까 싶었다.
일립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해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운 다음 큐비클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빨려 들어간 공기는 더미의 빛을 앗아갔고 피부 조직 아래에 검붉은 멍울이 꿈틀거리며 인영을 삼켜나간다. 산산 조각나기 직전의 더미에게 급히 무언가를 찌르자 용암처럼 살벌하게 끓어 넘치던 피부가 천천히 진정되었다. 초록색으로 발광하며 썩어가는 죽음을 연상시키던 멍울들이 살빛을 차아가자 일립은 더미의 하반신이 있었을 법한 위치에 재생기를 작동시켜 뼈대를 형성시킨다.
"이플. 조금만 더 버텨요."
이플은 달아나려는 정신과 전력 부족으로 덜렁거리는 신체를 붙잡으려 애썼다. 다행히 재배치된 동력원으로 우선 몸을 곧게 세웠다. 그 사이 얼추 다시 인간의 모양새가 된 더미를 일립이 깨우고 있었다.
"일어나. 왜 안 되는 거야." 희미하게 희망이 묻어 나오던, 떨리던 목소리가 곧 울먹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떨궜다. 그의 시선 끝 창백한 더미의 얇은 눈꺼풀. 그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안내한 목적지가 여기였을까. 천천히 다리를 끌어 일립의 절망과 이제는 사람의 모양새를 한 더미에게로 향했다. 더미의 목 언저리에 꽂혀 있던 건, 일립이 제게서 받아간 숨을 담은 실린더였다.
"죽은 것을 살릴 수 있는 것은 한 줌의 숨뿐이다."
이플은 자신의 기억일지도 모를 알 수 없는 문장을 중얼거리며 더미에게 입을 맞췄다. 어리석었던 그의 오래전 소유주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폐에서 뱉어진 날숨은 더미의 구강으로, 인간과 99.9% 유사성을 자랑했다던 기도를 지나 세 개의 인공 펌프 개폐 장치로 이루어진 허파로, 잠겨 있던 시간의 수문을 열고 가속시키기 위한 마지막 열쇠로 힘차게 급류 했다.
더미가 눈을 떴다. 텅 빈 동공, 아마 저 너머는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백지겠지. 이플의 왼쪽 눈알의 초창기 모델쯤 될까. 그렇다면 내가 너와 다른 점이 뭘까.
평범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자격이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생물학적 신체가 소실된 반쪽짜리 자신은 어디까지가 인간일까. 기억을 회수당한 자신보다 완벽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저 더미가 오히려 생물종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이제 막 뜬 멍한 눈동자에 다시 시선을 맞췄다. 갓 태어난 그는 느리고 태평했으면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자신의 두 손과 막 생성 된 하반신에 눈길을 주고는 이플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끝을 쥐어 본다. 피부의 온기가 아닌 물질의 촉감. 과부하로 체온이 높은 이플의 손길에 그 손끝도 조금 데워졌다.
"이플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멀리 어둠 끝에서 무장한 부대와 전투 변형을 마친 로피가 보인다. 프릿을 공격 모드로 전환시키고는 다른 한 손을 뻗어 일립에게 무기를 건네받았다. 대신 그 손에 메모리 코어를 건넨다. 기억이 나는 순간들은 모두 다 담았다.
“폐기해, 목숨 걸고. 부탁할게.”
무엇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일립은 찰나, 눈물을 참으며 이플의 손을 꽉 쥐었다.
“악수는 한 셈 쳐요.”
일립은 여전히 무의 눈빛으로 이플만을 바라보는 더미의 잡아끌었다. 더미는 이플과 그 너머의 일렁이는 불빛, 어둠 속에서 접근해 오는 총구의 섬광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의 손에 이끌려 순순히 일어섰다. 선량하고 나약한 눈빛. 처음 일립으로부터 느낀 불안감을 기억해 냈다. 위험 신호를 감지하는 인간의 직감. 그건 어디까지나 이플 고유의 능력이었고 이번에도 옳았다.
기억을 잃은 후로 제 안에서 크기를 키운 어둠의 실체는 슬픔이었다. 사실은 언제나 슬펐고, 외로웠고, 막연하게 사랑할 것들이 그리웠다. 기억이 없어 더 이상 애정을 둘 곳 없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여전히 욕망한다. 감정을, 과거를, 기억을, 그리고 미래를. 자신은 실패했지만 더미는 찾아내길 바랐다.
텅 빈 눈이 아니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무한한 시작의 순간. 이플은 가을 풀벌레 소리 같던 전우의 후각과 프릿 끝에서 느껴지던 차가움을 떠올렸다. 다른 것은 없었다.
“아… 이건 담지 못하겠네.”
어떨 수 없지. 이플은 웃으며 기억 영구 소실 모드 작동시켰다. 일립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더미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천히 작아지는 그 둘의 뒷모습이 어딘가 닮았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뒷모습을 뒤로한 채 이플은 고민했다.
갑자기 죽게 생겼으니 계획을 바꾸자. 시간이 없으니 기왕이면 짧고 효율적으로. 마지막은 실패하지 않도록.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이 완전히 소멸되기까지, 딱 그만큼의 시간만을 원한다. 더 이상 의문을 안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잔해와 함께 머무르고 싶지 않다. 자신이 완벽히 삭제되기까지, 세상에서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한 이플의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려고 한다. 마지막 명령을 수행시키기 시작한 프로그래스 바가 천천히 차오르며 0을 향해 움직인다. 공중을 향한 그녀의 손끝에서 화염이 발사되었다. 불꽃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