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의 화석 4

by stdmtm


일립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경계는 느슨했고, 무거운 문도 쉬이 밀린다. 전력이 모두 차단된 황량한 공기는 낯설고도 상쾌해 침입자 주제에 들뜬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맥없이 고꾸라진 핵분열기를 발견하고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시들한 저 고철 덩이리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 한 부대의 전력을 대체했다. 동력체를 업신여기는 인간 용병들을 비웃으며 존재를 지워냈다. 잔해가 남지 않으니 죽음을 제대로 확인할 수 조차 없어 명성은 느리게 펴져 나갔다. 눈앞에서 생명이 증발하는 순간을 반복해서 경험하고 나서야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흔적 없이 사라진다.


처음에는 의심했고, 두 번째는 궁금했다. 긴박한 순간에도 두 눈은 사라지는 아군을 추적하려 애썼다. 마지막에 사라지는 신체는 어디일까. 어느 날은 귀였고, 어떤 날은 손톱, 또 다른 날에는 자신과 마주친 눈동자였다. 실체 없는 공포는 그림자가 되어 은밀하게 어디든 따라붙었다. 열망하던 죽음의 존재는 여전히 모호했지만 분명히 한층 더 가까워졌다. 두려움, 후련함, 체념 뒤에 숨겨진 환희. 적어도 사라져 버린 자신은 영원히 해방될 것이다.


남은 시체도 없으니 제대로 알 수 없어 귀환자를 기준으로 속아낸 전사자의 넋을 기렸다. 추악한 곳에는 자신처럼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나 발을 들일 줄 알았기에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마주할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발갛고 열이 오른 얼굴로 무릎께에 안기는 아이들의 온기에 두 손이 갈 곳을 잃곤 했다.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슬퍼할 사람이 남아있는 주제에 죽음을 차지하다니. 그 마지막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이플의 방황은 뿌리가 깊어 지루하고 잔잔하게 끈질겨 뛰어들지 않도록 자신을 붙잡아야 했다. 불길하게 동태 눈깔을 하지 말라며 걸어오는 시비도 애정처럼 느껴졌다. 어떤 방식이든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라고 다독여 준 이들은 사라졌고 등 떠밀려 못 이긴 척 죽음으로 내달리던 이플만이 시답잖게 생존하여 과거를 추모하고 있었다.



천천히 다음 게이트를 통과하자 공기가 흐름이 변한다. 내부는 빛 한점 없이 깜깜하다. 익숙한 어둠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려 노력해도 걸음이 빨라진다.

마침내 마지막 문 앞에 섰다. 커다란 돔의 끝, 긴 터널 같은 공간에 들어선다. 눈앞에 닥친 미지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공허한 공간 어딘가에 목표물이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며 걸음을 내딛자 결이 다른 어둠이 펼쳐진다. [1]라이브 보드에 띄워둔 좌표계 덕에 직선으로 걷고는 있지만 이토록 막막한 암흑은 이플에게도 처음이었다. 멀리서 해체된 [2]하폰의 검붉은 점이 가물거리다 사라졌다. 자신도 모르게 프릿을 전투 모드로 전환하자 그럴 리 없는데 차가운 총의 개머리를 쥔 것 마냥 서늘한 감각이 전해진다. 감각의 오류, 두려움을 야기시키기도 혹은 그로 인해 유발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리적 맹점을 제거하기 위해 뇌의 일정 영역을 밀랍화 시키는 사냥꾼이 늘어나는 추세다. 아니, 사냥꾼이 아니라도 필요하다면 개조는 당연한 세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단지 필수 수용 기관을 싣는 편리한 그릇 이상도 아니며 그마저도 효율과 기회비용을 따져 대체된다면 어느 순간까지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지 그 경계는 누구도 답할 수 없었다. 어떤 형태도 인간에서 시작되기만 했다면 존중받을 수 있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너그러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혈류로 뛰는 심장과 감정의 영역에 한 발을 들인 것이 이플의 유일한 정의이자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지금 앞이 보이지 않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문득 처음 겪는 어둠의 충격으로 사망한 리움인에 대한 가짜 뉴스가 떠오른다. 풍족한 리움 보호령 안에서 나고 자란 인간이 처음 겪는 완전한 어둠에 겁에 질려 심정지가 온 사건은 반군과 자유지역에게 조롱거리자 좋은 선전 거리였다. 진실은 반군의 공습으로 차단된 전력 때문에 멈춰 버린 인공 심장이 사인이었고 때맞춰 뒤집힌 여론을 틈타 리움은 경계 지역을 급습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공습이 있었는지, 공급 장치가 멈췄을지, 반군이 개입되긴 했을지, 애초에 사상자가 있긴 했을지 분명한 것 하나 없었다. 이플이라면 혼자서 전력 장치를 공격하고, 심정지가 온 척 실려가 의사를 죽이고 시체를 위장해 쉽게 사실을 날조했을 것이다. 뭐가 되었든 완벽한 어둠에는 기능성 안구조차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에 혀를 차며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간다. 왜 확대 기능을 이식했을까. 차라리 조리개를 확장했어야 했다. 이번 일을 마치고 나면 식별체 기능 이식까지 고려해야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초조함을 달래려 애쓰지만 라이브 보드에 띄워진 맥박 수는 자꾸만 치솟고 있다.

울렁거리는 마음은 독이 되고 불안을 돋운다. 걸음 수로 거리를 예측해 보건대 공간의 끝에 거의 다다랐을 터. 하지만 여전히 공기의 울림은 텅 비었고 온도의 변화조차 없었다고 느낄 즈음,


잊고 있었다. 이 오래된 어쓰본의 풀네임이 빛나는 더미였음을. 투명한 상반신은 멀리서 더 빛난다. 영롱한 초록은 싸구려 종이에 인쇄된 염료와 확연히 달랐다. 좀 더 익숙하고 매혹적이고.


언젠가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으로 불렸을 때, 생태계와 교감하던 종들이 풍요롭게 넘치던 기록 속의 지구의 빛. 생명을 품을 줄 알던, 낙원이라 불렸던 퇴색한 과거. 이플은 더미의 생처럼 유명을 달리 한 지구의 명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시대 지구에 마지막으로 기억을 남겨두고 모든 걸 잃은 자신도 추모했다. 순간 푸른 점은 두둥실 날아올라 여러 겹으로 번지다 중첩되어 어둠을 메꾸었고 폭발하 듯 어둠을 가득 채우며 팽창하는 거대한 빛무리의 환영을 보았다. 사라진다. 이렇게 눈앞에서 목표물을 잃을 수 없다. 저곳에 닿아야 한다. 이플을 재빨리 좌표를 고정하고 타겟 지정을 기동시켰다.



[스캔 불가합니다. 목표물 지정 실패]






[1] 라이브 보드. 사용자의 눈앞에 좌표계, 데이터, 신체 활동 지표 등 요청한 정보를 보여주는 인터페이스

[2] 하폰 Hapoon. 고래잡이용 작살. 수중, 진공에서도 정확한 추적이 가능한 무기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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