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저스 1.

by stdmtm
ICE. 얼음은 더 이상 H20 결합 구조가 아닙니다. 순수한 물, 섭취 전 반드시 확인하세요.


큰 홀을 에워 산 커다란 스크린들이 어두운 내부의 공기를 울리며 일제히 같은 화면을 송출한다.


[1]슬러-릭스(Slurrice). 슬러릭 아이스는 순수한 얼음이 아닙니다.


[2]슬러릭스-베일(Slurriced Veil). 보이는 것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얼음은 더 이상 물의 고체 형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전히 물의 결정이 존재한다고 해도 세상이 반(半) 결정성 고체 입자에 삼켜지고 난 후의 세대는 얼음을 먹을 수 있었다는 걸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신경계
시력
피부 질환
호흡 질환


차분한 목소리로 반복되는 경고 문구가 섬뜩하다. 입구에서 화면만 멍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수상했는지 안내자가 다가온다.


“실례지만 초대받은 분만…, 아,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앰블럼을 알아보고는 정중하게 에스코트를 권하는 그에게 조용히 고개를 젓고는 2층으로 향했다.


“주인공이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안 올 생각이었어.”

“늦었어요.”


군중 속, 어둠을 틈타 몸을 숨겼지만 체스는 너무도 쉽게 가마우리를 찾아냈다. 인간 외 동력체 교육이 끝난 모양이다. 너의 식별 정보는 무기라고, 너를 개인 소유 무기로 등록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혐오에서 조금이나마 떨어뜨리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네가 왜 거기 있냐고. 더 따져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닫았다. 체스가 가마우리를 혼자 떠나보내지 못했 듯이 자신도 따라오겠다는 체스를 말리지 못한다. 아마 그날 그 폭발로 최초 소유자와 가족 모두를 잃은, 어린아이의 손만을 잡고 탈출 한 체스의 프로토 명령은 남겨진 아이의 생존으로 지정된 모양이다.


“… …정말 묻기 싫은데,”

“교육은 나쁘지 않았어요. 꽤 흥미롭던걸요. 그리고.”

“네가 받은 지령이 뭐든, 마지막 승인자는 나야. 알지?”


대답이 없다. 체스도 나름 갈등하고 있겠지. 지겹도록 오랜 준비 후 개제되는 중요한 출정에 어쓰본을 포함시킨 목적, 임무와 자신의 소유주의 안위 사이에서 가장 마음이 복잡한 건 그일지도 모른다.


어쓰본 (Earth-born)


원래는 움직이는 모든 동력체를 평등하게 지칭하는 개념이었지만 그 사건 이후 인간이 아닌 지구 태생 동력체로 지칭하는 범위가 좁혀졌고 평등의 상징은 인간이 아니라는 꼬리표로만 남았다.


때마침 스크린에서는 슬러릭스 폭풍을 만났을 경우의 대피법이 재생된다.


하나, 가장 가까운 지하 대피소로 이동하세요. 반드시 지열 발전 가동 표지판을 확인해야 합니다.
둘, 구비된 헴노바 냉착탄을 출구 밖으로 정확히 조준하세요.
셋, 게이지를 확인합니다 .150 SIC 이 넘기 전 발사, 반드시 5초 안에 격리하세요.


곧 슬러릭 아이스 입자를 제거하는 냉착탄의 메커니즘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세이프, 세이프, 결합 물질 옆 메세지가 하얗에 반짝일 때 마다 어두운 높은 천장 근처 벌써 뿌옇게 변하기 시작한 공기를 가르며 빛이 번지다.


대기에 부유하며 거대한 결정이 되기도 작은 미세 입자가 되기도 하는 슬러릭스는 원래대로라면 인류의 다음 세대를 위한 기적의 발견이었다. 인공 동력체들이 체액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 바이오 플럭스 혈액 내 새 에너지원인 [3]헴노바의 상용화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대규모 생산라인의 가동을 기념하기 위한 날, 그믐의 깜깜한 하늘을 수놓던 불꽃과 함성, 웃음소리와 황홀한 눈빛이 밤을 수놓았다. 앞으로 근 몇 세대 안에는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축제의 밤은 그렇게 지옥이 되었다.


생체 에너지 헴노바는 고온, 고압, 극저온, 방사선, 진공 상태까지 안전성이 검증된 미래의 희망이었다. 발화점도 어는점도 없지만 어쓰본의 신체 내에서 연소가 시작된다면 불탈 수 있다는 걸 왜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그 비극을 늦출 수 있었을까.


산채로 발화한 어쓰본에게서 옮겨 간 불씨는 단숨에 모든 세상을 집어삼켰다. 각자의 소중한 인간을 보호하려 몸을 던진 어쓰본들은 폭발 매개체로 돌변해 가족을 감싸 안은채 기폭제가 되어 소중한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파괴했다. 조화롭게 섞여 있는 인간과 어쓰본은 말 그대로 발화제가 골고루 배합된 시한폭탄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음악처럼 형태 없이 강렬한 폭발음들이 앞다투어 터졌고 암전, 비명, 그리고 공포. 가동 준비를 마친 커다란 생산 공장의 탱크는 연달아 터지며 그 안의 물질들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고 지구의 대기는 변화했다.


마지막, 위험 대기를 응축시킨 냉착탄은 수거해야 합니다. 본인의 안전이 확보됐다면 바로 본부로 신고하세요.


사고 수습보다, 슬픔을 경건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보다 더 이르게 혐오는 시작되었다. 대기 성분이 달라지고, 지형이 뒤틀렸다. 고립된 환경은 모두를 절박하게 한다. 모든 시스템이 파괴된 세상은 탓할 대상이 필요했다.


명심하세요. 슬러릭스, 빠른 대처만이 살 길입니다.


지겹게 반복되든 화면이 멈추고, 72 분, 오늘의 카운트 다운이 떴다. 현재 시간보다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편이 더 말이 되는 세상. 아무리 정화시설이 유지되는 도시라고해도 많은 사람이 모이면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한 시간이 넘다니 대단한데요, 관리팀에서 고생 좀 했겠어요.”

“그러게, 쓸데없는 짓을.”


중요한 집회도 20분 내외, 참가자 수를 엄격히 제한하는 걸 생각하면 파격적인 시간 배분이었다.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오늘 이 자리는 출정 대원들과 가족들의 영광을 위한 자리이니 그들에게 시간을 조금 더 떼어준 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마우리는 행운이었다. 자신을 그리워할 사람이 없으니, 적어도 떠나서 잠은 편히 자겠지.



§


“너는 무기고 소속이라고 한 번 더 확인했어.”

“거참, 모나게 굴지 말라니까.”

“너도 명심해. 너는 어쓰본이 아니라 내 소유로 등록된 무기야. 그러니까 뭘 들었든 잊어버려.”


확인했다는 말은 관리자와 출정 팀의 리더를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쳤다는 뜻이라는 걸 체스는 안다.


“식민 시대도 아니고 무슨 개소리야.”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이를 부득부득 가는 머리를 쓰다듬자 정수기 꼭대기가 뜨끈 뜨근하다. 체스는 그 옛날 자신의 열감지기에 닿았던 아이의 높은 체온을 기억해 냈다. 다 자랐다지만 제게는 여전히 아이 같은 2대 소유주를 보자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마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지원하지 않았다면, 체스가 동행할 일도 없었을 테니 결국 그를 사지로 몬 게 자신이라는 자책이었다. 한바탕 열을 올리고는 다시 바이크 정비에 집중한다.


이전에 구축해 놓은 경계까지 약 500 키로. 만약 아무 문제 없이 도착한다면, 거기다 조금의 행운을 더해 돌아올 수 있다면 최소 1000 키로를 달릴 연료가 필요하겠지만 도착지까지도 간당 간당할 만큼만 담았다. 지난 탐사 GPS 기록으로 보건대 이 정도면 충분할 터였다.


“더 담아요. 중간에 멈출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기회를 놓칠 세라 체스가 연료량을 지적했다.


“쓸데없는 감상에 젖을 바엔 가서 연료나 더 받아와요.”

“잔소리.”


불만을 표해봤자 가볍게 흘러 들은 체스는 전술 배낭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밧줄, 공기통, 생존용 각성 앰플, 신호탄, 단검, 여분 냉착탄. 몇 번이나 확인한 백팩을 꼼꼼히 잠근 체스는 마지막으로 목에 군번줄과 총알이 달랑거리는 목걸이를 걸어준다. 비상시에 불을 붙일 수 있게 햄노바를 고체 결정으로 만든 펜던트였다.


“의미 없어.”

“제가 말했죠. 꼭 의미가 있어야만 행위를 하는 건 아니에요.”

“… 그래도.”

“그냥 제 맘대로 하게 좀 둬요.”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체스의 찢어진 한쪽 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체내의 마지막 헴노바를 추출하고 남은 흔적, 체스 나름의 마지막 준비까지 마친 걸 확인하자 비로소 닥친 내일이 실감이 난다.




[1] Slurrice, slurry-ice, 반결정 형태의 얼음 입자

[2]반결정 형태로 공중에 떠다니던 입자가 형성한 투명한 막

[3] Hemo(혈액) + Nova(새로운, 신성의 불꽃): 인공 혈액 내에서 화학적 전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외부 동력 공급 없이 생체를 ‘연소시키지 않고’ 구동하는 생체 기반 에너지 매개체.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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