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저스 2.

by stdmtm

서클의 거주권을 박탈당한 날, 체스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숲의 얕은 지점에서 버려진 창고를 찾아냈다. 낡았지만 둘이서 열심히 보수해 집의 모양새를 꾸렸고, 협소한 공간의 안쪽 모서리에는 체스와 가마우리의 침대가 있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라 멀리 떨어뜨려 놓은 들 몇 걸음이면 성큼 가까워질 거리였지만 허름하다고 해도 둘의 보금자리였다.

한번 누우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체스가 인기척에 급히 몸을 일으킨다. 부스럭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멈추고, 곧 노크 소리. 잔뜩 경계하며 확인한 문 밖에는 55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문 앞에 있었다.


“뭐야, 이 늦은 시간에?”

“이거. 전해주러 온 건데.”

“굳이?”

“계속 모른 척하게? 서운하게”


사납게 노려보기만 하는 가마우리에 체스가 넉살 좋게 끼어든다.


“자자, 주는 건 고마운 거고, 시간이 늦은 것도 사실이고. 보다시피 이쪽은 아직은 잘 자줘야 하는 청소년이라서.”

“첫 출정 회의 때 나눠준 거야. 나는 다 봤으니 필요하면 보라고.”

“이런 구형 로그를 어디서 봐요?”

“그럴 줄 알고,”

가지고 왔지,라고 중얼거리며 무언가 꺼낸다. 가만 보니 본인의 출력 장치를 떼어낸 듯하다.


“안타깝게도 하나뿐이니까 내일 꼭 돌려줘.”

“애초에 안 줘도 되는, 읍읍”


체스는 가볍게 가마우리의 입을 막고는 얼른 조잡하게 개조한 영상 출력 장치와 오래된 기록을 건네받았다. 장치 겉면에는 기록자와 날짜가 대충 갈겨써져 있다.


“어차피 곧 볼 테니까 멀리 안 나갈게.”

“가만 보면 네가 제일 인간 같아.”


손을 뉘적이며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55는 체스와 같은 어쓰본 생존자로 작년, 소유주를 지병으로 잃었다. 계약에 따라 반쪽 짜리긴 해도 자유가 주어졌지만 자격이 생기자마자 출정 지원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선택을 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잘생긴 청년 외형, 유쾌하고 정의로운 성격 코드, 누구나에게 친절한 55였지만 사납게 덤벼들던 그의 살벌한 꼴을 가마우리는 똑똑하게 기억한다. 오랜 노력으로 체스가 더 이상 어쓰본이 아니게 된 날, 무기고 소속 넘버가 승인된 걸 알자마자 찾아봐 저주를 퍼붓던 절망에 가득 찼던 그의 표정을.

더 이상 소유주이 안위가 최우선이 아닐 체스를 향한 오해에서 시작된 그의 행동은 가마우리의 꼴을 더 우습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55의 충직함에 감명받아 최악이던 어쓰본의 여론은 좋아졌고 체스마저 그의 우수한 목적의식을 칭찬했지만 가마우리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55를 볼 때마다 점점 더 거북해졌다. 맹목적인 프로토 코드로만 움직인다면, 고작 소속 넘버 하나 바뀐다고 체스가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있지 않는다면 그게 애초부터 가족이었을까. 55의 행동은 명백히 말하고 있었다. 너는 그의 가족이 아니야.


정체성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체스는 여전히 체스는 소유주와 떨어지지 않기로 유명한 어쓰본이었고, 그 모습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55는 조금씩 살갑게 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둘이 웃으며 대화하는 걸 멀리서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애초에 남의 이목을 신경 썼다면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무엇도 상관없었지만 그 난리가 나고도 여전히 인사하는 체스의 속 없음과 55는 무신경함에 불만을 표해 보아도 돌아오는 건 어른의 세계는 원래 그렇다는 놀림뿐이었다.



“이건 어쩔까요?”

“어차피… 못 잘 것 같으니까.”


55가 준 건 다 맘에 들지 않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못 이긴 척 틀어주길 바라는 어린아이의 표정을 잃고는 체스가 웃으며 금방 영상을 재생한다. 기기를 조작할 때는 더 정확하고 유독 우아한 체스의 손끝으로 오래전 탐사 대원의 기록이 시작된다.


출정 일지. 기록자, VES, and FOU


지루한 설명이 계속되자 가마우리가 금방 흥미를 잃는다.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한참을 건너뛰자 곧 화면 가득 얼굴을 내밀고 각도를 조정하며 한 사람이 나온다.


음, 음. 정찰 기록. 기록자 VES, 데이 제로, 베이스캠프. 시작하겠습니다.
어색하지만, 우선 관행상 남겨야 된다고 하니까 잘 부탁합니다?

관찰되는 현상 보고 합니다. 도시 밖 공기는 확실히 질다. 손을 강하게 휘저으면 금방 축축하고 끈적한 얇은 막이 생긴다. 정찰 모니터를 위해 드론을 띄웠지만 예상대로 실패했다.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을뿐더러 얼마 올라가기도 전에 프로펠러가 굳고 모터가 과열로 터졌다.
불꽃이 슬러릭스에 얽혀 떨어지는 모양새가 아름다웠다. 아주 작은 불씨는 쉽게 결정에 옮겨 붙었고 호선을 그리며 천천히 추락했다.
몇몇은 PTSD로 과호흡이 왔고, 대응팀은 2차 폭발을 막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나는 그냥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고, 정찰 드론이 금방 파괴되어서 계획대로 이동할 수 없었고, 또…. 아, 대신에 기대하지 않았는데 파괴되지 않은 동네를 찾았습니다. 건물내부 확인 후 베이스캠프를 꾸리기로 결정했다. 결정했고, 현재 상황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첫날 기록은 여기까지입니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는 어색한 일지. 그 일이 없었다면 사회 초년생쯤 되었을까. 연달아 더 어려 보이는 얼굴의 누군가가 등장한다. 계속해서 카메라를 잡아주고 있었는지 녹화 장면이 흔들리고 조금 분주한 화면 전환이 이어졌다.


기록자 FOU, 데이 제로, 베이스캠프. 로그 기록 시작. 이상 없음.


다음 기록자는 잠시 생각한 후 짤막한 문장만 남긴 채 첫날 기록이 끝났다.


“우리처럼 팀으로 출발했나 봐.”

“반대 유형 페어링을 찾았나 본데요.”


얼굴 근육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잠시도 손을 가만 두지 못하던 로그의 주인과 짤막한 한 문장만 남기는 파트너, 그 둘의 기록은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뭐라도 말하라는 핀잔과 “방금 로그의 빈약함을 지적받았지만, 이해되지 않음.”이라고 지금까지 가장 긴 문장이 출력되자 둘은 웃어버렸다. 처절하고 절박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발랄한 분위기에 내심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다.


“쟤 기준에서는 그랬나 봐요. 상상했던 일이 예상대로 벌어졌다. 똑똑한 친구였네.”


VES/D+03.1/희미한 신호 감지 – 9.4 km 기상 상황 양호.

예상보다 강을 일찍 만나서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기로 했어요. 계측하는 분이, 이름이… 아무튼 그 사람이 말하길 반나절은 더 달려야 한다고 했는데 뭔가 움직인 것 같다고. 뭔가가 뭐람. 괜히 살아있는 게 지켜보는 기분이라 불쾌하기도 하고. 항의해 봤자 그럼 바이오팀인 나보고 해결하라고 하고, 내가 무슨 생물학자야. 학부 다니다가 세상이 폭발했는데 개론 밖에 더 배웠겠냐고. 아무튼 강의 위치와 지형의 정보는 수신 완료 했습니다.


FOU/ D+03.3/Eastern Border, Sector 11 – 10.2 km,
뭔가는 생물이 아니라 강의 지형을 변화시키는 변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대비되는 그 둘의 로그가 너무 우스워 체스와 가마우리는 웃어대기 시작했다.


겨우 초반부의 재생이 끝났지만 이미 새벽이 훌쩍 넘은 시간, 어느새 졸음이 밀려온다.


“있잖아, 체스.”

같이 자면 안 될까, 가마우리가 꾸물거리며 기어들어왔다. 더 어릴 때는 유일한 가족이며 보호자인 체스의 곁에서 종종 잠들곤 했었다. 매일매일이 고통이었고, 잠들 때쯤엔 늘 울음바다였던 시절.

도시가 재건되고 교육기관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 혼자 자기 시작했다. 사람처럼 보여도 사람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때는 그게 무서웠다. 체스가 있어도 혼자 남았다는 기분, 누군가 있는데 더 깊어지는 외로움과 고립감이 체스를 피하게 만들었다.


“웬일이래요.”

“…. 사춘기였어.”


놀리면서도 좁은 공간에서 몸을 움직여 가마우리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 긴장과 바뀐 잠자리에 불편한 듯 뒤척거리던 것도 잠시, 곧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게 해서 미안해.” 몇 번이나 들려오는 잠꼬대에 체스도 조용히 답한다. “살아남으라는 부담을 줘서 미안해요.”


§

예정 시간이 훌쩍 넘도록 도시의 하나뿐인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출발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새어 나오는 빛 한점 없다. 출정 인원들은 얼굴을 익힌 사람끼리 삼삼오오 모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고, 기술부로 보이는 두어 명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나른다. 어수선한 공기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하던 터, 누군가가 성큼 다가와 손을 내민다.


“가마우리? 그리고 이쪽이 체스?”


그녀가 내민 손이 어색해지기 전에 얼른 체스가 손을 맞잡는다.


“나는 달나,라고해. 추적팀이야. 팀이라고 하기엔 나 하나뿐이지만.”


쾌활하고 벽이 없는 말투에 가마우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첫날 없었지? 전달받았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이동보다는 지형 탐지기를 띄우는 게 목표라서. 이상태라면 출발이 힘들지도 몰라.”

“히스토리 로그에서 봤어요. 드론이 폭발됐다고.”

“이번 장치는 펜 없이 날리는 거라 괜찮을 거야. 그보다 산란 현상이 심해져서 방향을 잡는 게 먼저래. 게다가,”


일조량이 필수인 첫날의 탐색, 측량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세상이 깜깜하다는 것은 공기 중 슬러리 아이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그녀가 턱짓으로 가르친 방향을 따라가자 바리케이드 뒤 소규모의 집회 세력이 보였다.


“보이지? 출정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야.”

“무기력자들인가요.”

“아니지. 이 상황에는 오히려 인도주의자들이지.”


질문만이 가득한 표정에 달나가 답한다.


“그냥 열여덟의 동력체가 개죽음당하러 나가는 걸 반대하는 거야. 따지고 보면 제일 선한 사람들이라니까.”

“열여덟이요?”

“몰랐어? 마지막에 인간 한 명 더 추가됐어. 성당에 없었구나? 그날 발표했었는데.”

“성당이 아니라 노드 홀. 그리고 아마 딴생각 중이었을 걸.”


55가 불쑥 다가와 끼어든다.


“55!”

“달나. 다시 만나서 기뻐요.”


달나가 55의 손을 맞잡고 신나게 흔든다. 긴 곱슬머리가 잘 어울리는 쾌활한 달나와 훤칠한 55는 단연 눈에 띄었고, 주변에 인간관계라고는 없었던 가마우리는 그들 곁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졌다.


“저기 보이지. 작은 소년. 아마 쟤가 여기서 유일하게 너보다 어릴걸.”


왜소한 체형에 큰 장비를 짊어진 아이가 보인다. 두리번거리면서도 시선을 숨긴 채 마른 손으로 어깨끈을 꼭 쥐었다.


“너무 어려서 마지막까지 말이 많았는데 쟤가 그랬데. 가마우리도 가는데 자기는 왜 안되냐고.”


자신을 아는 사람인가. 도시 외곽의 공기는 좋지 못하다. 가시거리를 방해하는 희뿌연 입자들에 미간을 찡그리고 얼굴을 확인하러 애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도 안경 뒤로 이쪽을 보고 있는 듯했다. 자신은 의무 기간 외에는 도시의 교육 기간에 간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이들과 교류한 기간은 길어봐야 3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외톨이를 자처했기에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누군가가 없는데.


"전원 집결, Zone 3로 집결."


정적을 가르며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문이 열리면 되돌릴 수 없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달나와 55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체스가 꽉 묶어 준 부츠가 조여 발목이 저릿했다. 가마우리의 눈을 맞춘 체스가 말없이 어깨를 꾹 잡는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거칠게 갈리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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