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의 시간 (10)
나는 가장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미처 배우지 못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의 반려견 루이 이전에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천천히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수년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없었고,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 하나의 존재가 사물이 되는 순간을 목도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허망함, 사랑하는 가족의 상실에서 비롯한 여러 가지 깊은 감정에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다. 그저 슬픔이라는 이름으로 에둘러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나는 작은 유골함을 어루만지면서 울기만 했다. 루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고, 죽음과 이별이라는 상황이 몹시 부당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내 감정은 원망에 가까웠다.
'도대체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나에게 이런 일이..??'
'그 병원의 담당의사는 왜 더 적극적으로 처지 해주지 않고 퇴원시킨 거야?'
'당신은 그때 왜 나를 깨우지 않았어? 왜 루이에게 약을 먹이지 않고 무책임하게 잠들어버렸어?'
우리에게 벌어진 비극의 원인을, 책임을 물을 대상을 찾아내 화내며 소리 지르고 싶었다. 최근 몇 달 사이의 기억을 더듬어 아주 사소한 흠결을 기어코 찾아내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다. 당신이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 루이가 며칠은 더 살았을 거고, 이별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거라고 우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함께 루이를 돌봐온 남편까지 비난하며 해서는 안될 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비난의 화살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원망의 감정은 더 깊숙한 과거의 시간 속으로 성큼 들어가 내 머릿속 기억을 뒤져댔고,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인 나는 루이에게 저지른 실수와 잘못 따위는 천만 개도 더 꺼낼 수 있었다.
'루이가 조금이라도 식욕이 있을 때 좋아하던 음식을 줄걸. 맛있고 신나고 즐거운 기억을 남겨줄걸'
'심장병을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그때 루이를 더 큰 병원에 데려갔더라면..'
'애초에 루이에게 더 좋은 식습관을 길러줬더라면 신장 기능이 더 오래 버텼을 텐데..'
밖을 향하던 원망은 안으로 파고드는 후회가 되었고, 곧 다시 끔찍한 자책의 감정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고, 저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아픈 루이를 두고 밖으로 돌아다녔나. 난 정말 형편없어.'
'루이가 원하는 게 뭔지 알면서 왜 한 번이라도 더 놀아주지 않았어. 난 엄마 될 자격이 없어.'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도 모르고.. 그저 전전긍긍하며 부산하게 살았지. 어차피 아무것도 남지 않잖아. 난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야'
상실감은 분노가 되었다가 다시 회환의 감정이 되기도 하면서 안과 밖을 향해 요동쳤다. 그러다가 루이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매일 약만 잔뜩 먹여서 미안했다고, 엄마도 루이에게 주삿바늘 찌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고.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정말 사랑했다고.
루이가 이곳을 떠나간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아침마다 유골함 옆에 작은 꽃병과 촛불을 두고서 루이의 사진을 쳐다본다. 그리고 거의 매일 울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오열하는 빈도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운전 중에, 길을 걷다가, TV를 보다가, 빨래를 하다가. 문득문득 눈물이 맺힌다. 서럽게 목놓아 우는 날도 있고, 조용히 또르르 눈물 줄기가 흐르는 날도 있다.
종종 내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이 슬픔은 세상을 떠난 루이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남겨진 나 자신을 위한 것일까? 이 마음을 애도라고 불러도 되는지.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죽은 이를 기억해야 하는 건지.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삶의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 태어나기 전 머물던 곳으로 돌아간 자를 위해 비통해할 것이 아니라 축복해야 한다. 축복해야 할 이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를 위해 우는 것은 광기이다.
나의 이러한 마음은 어쩌면 자기 연민에서 비롯한 광기일지도 모르겠다.
본디 무신론자인데도 불구하고 종교에 기대 추모 했다. 49재 상을 손수 차렸고, 절에 영가등을 올리고 천도재를 지냈다. 무기력함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조언에 운동도 등록하고, 항우울증 약을 처방받았다. 사람들을 만나 떠들거나, 쇼핑과 여행으로 기분을 전환하려 애쓴다. 그렇지만 지금 내 마음은 어떻게 해도 쉽사리 고요해지지 않는다. 근사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 먹으며 내가 이 세상에 속해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히죽거리며 좋아하다가, 문득 흰나비를 본다던가 루이와 닮은 강아지를 볼 때면 상념에 젖거나 또다시 슬픔이란 감정에 휘둘려 눈물이 터진다. 그 슬픔은 내가 아무리 따돌리려 온 힘을 다해 달려도 내 옆으로 찰싹 따라붙는다.
반려동물의 죽음은, 남겨진 인간에게 너무나 큰 슬픔이다. 그리고 그 슬픔의 크기는 서로 교감하며 나누었던 따뜻하고 행복한 감정만큼이나 깊다. 반려동물의 시간은 너무도 짧아, 인간이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로 치르는 대가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보다 더 큰 가치가 있기에, 나는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루이와 기꺼이 가족이 될 것이다. 그래서 루이와 사랑하며 행복해하고, 루이를 먼저 떠나고 남겨진 후.
그 모든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