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 가을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라데팡스로 발걸음을 향했다. 기분도 가라앉고 집 밖으로 나가기 싫었지만, 이미 2주 전쯤 Etienne에게 먼저 콜드 메시지를 보내 애프터워크 약속을 잡아두었기에 지하철을 타고 발걸음을 옮겼다. Etienne은 예전 직장에서 테크팀 리드를 맡았던 분으로, 내가 회사를 떠나기 전에 라데팡스의 한 대기업의 Software Architect Director로 이직한 분이다. 이 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전 회사에서 유일한 외국인으로서 초반에 낯을 가리고 있었을 때 먼저 내게 '너도 우리 테크팀 애프터워크 가는 데 같이 갈래?'라고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셨기에 호의적인 첫인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1년 후, 불현듯 이 분이 생각나서 링크드인으로 나도 모르게 "잘 지내시나요, 혹시 시간이 되시면 15분 정도만 시간을 내주세요"라고 부탁 메시지를 보냈고, 감사하게도 15분이 아니라 2시간 반동안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보고 불어가 그 사이에 정말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주셨다. 덕분에 맨땅에 헤딩하듯 불어를 1도 모르는 상태로 용감무쌍하게 파리에 와서 고생했던 지난 4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서 문득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몇가지 인사이트를 복기해본다.
"순수한 열정이야."
Etienne은 무엇을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보통 저녁 6시에서 11시 사이에 집중적으로 개발한다고. 만약 억지로 했더라면 지금의 위치에 올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또한, 미국이나 영국과 다르게 프랑스는 개발자나 엔지니어보다 매니저가 돈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본인은 직접 개발에 참여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한때 최고 매니저 레벨까지 갔다가 다시 부탁하여 (월급이 깎이더라도) 개발자로 전향(?)했었다고. (Jean도 같은 답변을 했었다! 신기하다)
"너의 한계를 정해야 해."
Etienne은 자녀가 어렸을 때 특정 시간과 주말을 꼭 확보하여 딸과 양질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업의 특성상 밤늦게까지 일하게 되는 게 당연해질 수 있다고. 아이를 갖고 싶은 30대 여성 기혼 이민자이자 테크 분야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삶의 특정 시기에 너만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에너지를 선택 및 집중해야한다는 그의 조언은 매우 울림있게 다가왔다.
"가장 중요한 건 논리적 사고야."
Etienne은 내가 이미 논리적 사고를 잘 갖췄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데이터 알고리즘과 자료구조를 탄탄하게 다지는 것, 그리고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네트워크 지식이었다. 언어(e.g. Python, C, Java, Kotlin, etc)는 최후순위라고. 요즘 주니어들은 이 중요도를 거꾸로 알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결국 소프트웨어의 근본을 이해해야 응용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첫 회사 Tech Lead의 조언과 일치! 너무 신기하네. 다들 같은 말을 하네!)
"오픈소스에 기여해."
Github의 주요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꾸준히 기여하면 추후 이력서에도 강력한 스토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 외에 직접 토이 프로젝트로 서비스를 출시해보는 것도 좋다고.
"승마(équitation)지."
승마가 가장 큰 열정이라고 했다. 현재 사이드 프로젝트도 진행 중인데 세일즈 단계에서 막혔다고. 엔지니어라 세일즈는 좀 어렵다는 고백을 했다. 내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혹시 한국으로 사업 확장하고 싶으면 연락 주세요. 한국 마사회에 아는 분 연결해드릴게요"라고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후로는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Etienne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는 링크드인 확인을 거의 하지 않는다며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고, 내가 프랑스에서 테크 프리랜서를 시작해보고 싶다고 하니 추후에 아는 분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요즘 관대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잘나갈 때는 자연히 사람이 모이지만, 어려울 때도 연민 없이 공감과 유용한 조언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는 자리였고, 언젠가 Etienne에게 받은 호의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