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공기가 좋아서, 산책하기가 좋아서 그런 말들을 갖다 붙이지만 사실 집값이 매우 싸다. 그 이유하나만으로 다리 하나를 건너 시내로 진입하지 못하고 변방에 눌러앉은 지 15년쯤 되어 간다. 변방에 산다고 하면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씩 걸리나 하겠지만 그래봤자 20분을 넘기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출근하는데 40분이나 걸렸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와서 도로 다녀온 것도 아니면서…. 기운이 다 빠져 집에 가고 싶다. (지금 심정은 그렇다.)
2월부터 다니기 시작한 새벽 수영을 배탈이 났다는 핑계로 잠시 쉬면서(배탈은 하루만 났지만 수영은 일주일을 쉬었다) 출근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오늘은 8시가 넘어서도 어슬렁어슬렁 집안을 헤집고 다니다 지금 출발해도 30분이면 도착하겠다 싶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그 시간에 출발했음 정실줄을 차려 제시간에 사무실 들어갈 수 있게 긴장했어야 하는데 내 머릿속 회로가 살짝 고장이 난 상태로 출발한 것인지 정실을 차렸을 때는 평소 길 막힌다고 피해 다니는 길에 이미 들어서고 있었다.
그 도로는 외곽으로 대단지 아파트가 생기면서 아침이면 차가 밀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잘 다니지 않는다. 대신 내비게이션도 길이 아니라고 자꾸 유턴해 도로로 나가라고 안내하는 시골길로 돌아 돌아출근한다. 내가 다니는 그 길은 아직도 농사를 짓는 땅이 있어, 봄이면 매화가 피는 줄을 알고, 여름이면 벼농사를 짓는 논도 몇 떼기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시골길이다. 그 길이 좀 둘러가긴 해도 길도 덜 막히고 한적하다.
그런데 무슨 정신으로 그랬을까? 이미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내 차는 평소 피해 다니는 길에 접어들어 있었다. 이러면 어쩔 수 없다.
‘천천히 가면 되지.’
지각 한 번 했다고 이 나이에, 이 연차에 쫓겨날 것도 아니고, 나를 야단 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맘 급할 거 없었다.
앞차의 속도에 맞춰 강변도로를 천천히 달리고 있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럽게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몰라도 좀 비켜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룸미러로 뒤를 보는 순간 그 구급차는 바로 내 뒤에 있었고, 제발 빨리 비켜줬으면 하는 차가 내 차였다.
얼른 정신이 들어 서둘러 옆 차선으로 비켰는데 하필 우회전 차선으로 차를 뺐다. 앞의 신호는 이미 빨간색으로 바꿨고, 나는 우회전하기 직전의 위치에서 우회전 차선에 차를 멈췄다. 출근 시간이다. 직진할 차도 많지만, 우회전해야 하는 차도 많은 법. 빙빙 둘러 가야 할 길이지만 일단 우회전해서 다시 연결되는 도로를 찾으면 될 일이다. 우회전 후 어디로 가면 길이 막힐 것인지? 이 길로 가면 좌회전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등등의 이유를 들어 잔머리를 잔뜩 써 가면 샛길로 들어서는데 이번엔 가스관을 매설하는 중인지 저 앞에서 형광 조끼 입은 사람이 길을 가로막고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있다.
‘아~ 조졌다.’
다시 골목길로 좌회전, 다시 우회전 겨우 사무실에 도착하니 40분이 넘어 있다.
이런 날도 있는 거다.
이런다고 해서 그날 하루가 통으로 재수 없는 것도 아닐 것이고, 그날 내게 와야 할 불행이 길 한번 잘못 든 거로 퉁 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순간순간의 일들이 뭔 대단한 의미가 있던가? 그냥 상황일 뿐이지.
사람이 살다 보면 길을 잘못 들 수도 있고,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돌이켜 그 옛적에 우리 아버지께서 중앙시장에서 아직 가게를 운영하고 계실 때, 가게 문을 닫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오시다 상봉서동 어디쯤에서 거리 귀신한테 잡혀 천날만날 다니던 길에서 길을 잃고 한 시간을 넘게 헤매신 적이 있었다. 해가 다 지고 오밤중에 반쯤 정신을 놓고 집에 오셨다. 아버지께서 길을 헤매시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우리 집에서 10km가 넘게 떨어진 공단 어디쯤이었다고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으니 그때 아버지 연세가 지금의 내 나이쯤이지 싶다. 그러니…. 그럴 수도 있는 나이고, 일이다.
살다가 하루쯤은 길을 잘못 들어도 괜찮고, 늦어도 되고…. 그렇게 살아도 다 괜찮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