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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 Apr 09. 2024

아프면 쉬면 되지.....

나는 아프면 쉰다

나는 아프면 쉰다.      


건널목에 신호등에서 보내는 신호에 무심하다가 교통사고가 나고, 쪼그라드는 잎사귀 신호에 무심하다 화초들을 말려 죽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신호에도 이러니 보이지 않는 몸의 신호에 얼마나 둔감했을까? 그러다 덜컥 병이 났고, 병을 치료한 후 기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치료를  했으면 더 건강하고 단단해져야 하는 게 맞지 않냐고 항변해 보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모르는 게 약이고, 무식한 게 힘이다.


알고 나니 더 아프고 더 고단하다.      

조금만 팔이 아려도 ‘혹시 아작아작 밟아 놓은 그놈이 다시 기운을 차렸나?’ ‘내가 먹은 좋은 음식들이 그놈을 더 강하게 키웠나?’ 등등 긴장이  된다.

의사 선생님은 분명히 암이란 애가 오늘 크고 낼 크는 애가 아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에 숨어든 그놈은 별스럽게 오뉴월 물 외 크듯 자라고 있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니 팔이 아려도 쉬고, 머리가 아파도 쉬고, 그냥 무기력해도 쉰다.


걱정하느라 지친 몸을 어쩌지 못하여 드러눕는다.

     

그래서 어제도 쉬었다. 쉬면서 병원 가서 영양제를 주사 맞고, 한의원 가서 침을 맞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등짝에 경락 마사지라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망설이면서 온종일 몸 생각을 하며 지냈다.


뭘 먹어야 건강할까? 뭘 해야 근육이 덜 뭉치고, 몸이 따뜻할까? 그 고민에 하루를 다 소진하고 나니 저녁에는 맘이 아팠다.

내가 하루를 뭘 하고 있는지 싶었다. 텔레비전을 켜지도 않았고, 책장 한 장을 넘기지도 않았다. 먹고, 자고, 그 순간순간을 몸 걱정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그 하루에 또 하루를 보태고, 한 달을 보태며 살고 있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이런 거지 똥자루 같은 몸을 안고서 안절부절 살아서 무슨 부귀영화를 볼까 싶다. 살아 있을 때 겨우 안고 살아갈 이 몸 동아리를 애지중지 그만하고, 허공에 떠다니는 공기처럼 하찮게 생각하며 살고 싶다. 지난날의 습관을 후회했는데 다시 몸에 집착하며 살아보니 지난날의 내 모습이 맞았던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몸의 눈치를 보고 살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지 않다.      


30년 직장 생활을 해 보니 승진하고 싶을 때가 가장 비굴했고, 사람 관계에서도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강한 연애 시절에 가장 고단했었다.


죽고 사는 문제도 이와 같지 않을까? 오래 살고 싶은 그것만이 목적이 된 지금이 가장 비굴하고, 암에 걸린 내 몸에 너무 구차하게 약자가 된 게 아닌가 싶어 자존심이 상한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오래 살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없다. 그걸 걱정하느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하루를 살고 있다니 정말 불행도 이런 불행이 없다.  

    


이젠 ‘재발하면 어때?’로 살아보면 안 될까? 재발해도 나는 54년은 살다 가는 인생이다. 아이들도 25살이 이미 넘었고, 남편도 애인을 아내로 맞이해 지금까지 살았는데 좀 다른 기회를 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그럼 내가 죽고 사는 문제에 좀 더 자유로워지고 지금에 더 집중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인생을 막살자는 건 아니다. 이왕 술도 크게 좋아하지 않고, 담배는 피우지도 않는 사람이니 방탕한들 얼마나 더 방탕해질 것이며, 자유롭다고 하여 얼마나 더 자유로울까?


다만 낼 피곤할 게 두려워 오늘의 산책을 포기하고, 여행을 접으며, 퇴근 후의 영화 한 편 보는 것조차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일은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다. 햇살이 눈 부시다 싶으면 운동화를 갈아 신고 한두 시간 다리가 꽁꽁 아릴 때까지 산책하고, 봄소식이 들리면 월요일 앓아눕는 한이 있어도 일요일에는 기어이 길을 나설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또 지쳐서 드러눕겠지만 두려워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보낸 시간에 비하면 얼마나 달콤하고 황홀할 일일까? 내가 집에 드러누워서 몸을 편하게 한다고 해서 절대로 재발하지 않는다 해도 그 내게 행복을 주는 일들을 마주할 때만큼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팔순의 나를 만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방구석 팔순을 맞은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나면 나에게 절대로 그렇게 살아 팔순을 맞이하지 말라고 할 것 같다.


54살의 너까지만 살더라도 봄이 오면 간질거리는 너를 데리고 나서 들판에서 꽃들을 만나라고, 퇴근 후 영화관으로 달려가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좋은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라고 그게 사람이 사는 이유라고 말해 줄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볼 생각이다.


그러다 또 피곤하면, 지치면 다시 앓아누워 사무실에 결석하고,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서 일을 많이 해 피곤하다 엄살을 떨며 비타민 가득 넣은 수액을 맞으면서 그렇게 살아가 볼 일이다.      


 2022. 2. 16일          

      

※ 암수술을  하고  긴장하며  살  적에  적어둔  글로

이젠  이  소망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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