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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 Jun 04. 2024

밥벌이의 지겨움

목구멍에 풀칠을 못 할 형편이면 딱풀로 입을 붙여버리지머...

 간지 나게 사직서를 쓰고 나가고 싶다. 


 ‘원에 의해 그 직을 사직코자 합니다.’ 이런 거 말고 

구구절절 뭔가 ‘옜다 먹고 떨어져라.’하는 모양새로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조차 떠날 용기가 없어 미적거리는 나의 변명이 아닐까?    

 


 32년 동안 오만꼴을 다 보여준 동료이자 친구로 지낸 이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원에 의해 그 직을 사직코자 합니다.’ 딱 14자를 써서 던지고....

부러웠다. 그리고 늘 용기 없다 싶었던 그녀가 너무 용감해 보였다. 

그렇다. 축구 경기에서 44분 열나 운동장을 누비고 다녀도 마지막 1분에 골 먹고, 쓰러지면 지는 거다. 

나는 그렇게 그녀한테 KO패를 당했다. 경기가 개최되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싸우고 혼자 졌다. 

그래서 지금은 매우 우울하고, 맥이 빠진다.      


 2023년이 들어서면서 30년을 넘긴 동료들이 한두 명씩 사직서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이 아파 나갔다. 30년 동안 잘 다녀주던 발가락이 말을 듣지 않다가, 발로, 다리로…. 점점 기운이 빠져나가는 몸으로 더는 밥벌이하다 죽을 수는 없다며 사직을 했다. 

안타까워했었다. 

남들은 손가락만 하나 아파도 6개월씩, 일 년씩 병가를 내고 시간을 끌더니 지는 뭐가 잘 났다고 한방에 사직서를 내고 가나 싶어 괜히 억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었다. 


그녀를 시작으로 출근하면 가슴에 통증이 생기며 숨이 안 쉬어진다는 인간이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젠 하다 하다 떠났던 부서로 다시 보냈다고 성질난다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의 사직서에도 여전히 사유는 ‘원에 의해 그 직을 사직코자 합니다.’였다. 

바보…. 그게 어떻게 원에 의해 그 직을 사직하는 거냐고? 성질이 나서 그 직을 사직하는 거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주변이 비어 가다 이젠 부부가 같이 또 ‘원에 의해 그 직을 사직’했다. 잘 났다. 자기들이 무슨 햄버거와 콜라도 아니고 무슨 세트 메뉴로 사직서를 쓰고 지랄이야?     


 5월 봉급 명세서를 보니 기여금 떼가고, 세금 떼가고, 학자금 떼가고 내 손에 떨어지는 게 별로 없다. 그런데 연금을 보니 거기나 거기나 얼쭈 비슷하다. 기껏 한 50만 원 더 벌자고 머리끄덩이를 뜯어가며 아침마다 화장하고 나오나 싶어 괜히 맥이 빠졌다.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만 아껴도 그 돈 빠질 것 같은 이 착각, 그래 막실 넣고 놀자…. 싶은 맘이 또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직도 전염병이다.

 전염병이 걸려도 다 죽는 게 아니듯 나 또한 사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쨌든 간에 살아남아 내 삶을 이어 나갈 것을 안다. 그리고, 승진의 기회가 오거나 이직의 기회가 온다면 그 또한 스스럼없이 내 몫을 챙길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벌이는 여전히 지겹고, 사직서를 내고 떠나는 그들의 뒤태가 한없이 부럽다. 

이건 내가 밥벌이하는 동안 고쳐지지 않을 불치병이라 여기며 정말 더는 못 해 먹겠다 싶은 날이 오면 입에 딱풀을 붙여 아예 밥알을 입에 안 넣을 각오로 멋진 사직서를 써서 던져주고 손 흔들며 저 문을 나서고 싶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는데, 이미 KO패를 당한 내가 뭐...... 그래 부럽다. 부러워.     

 내가 쓰지 못한, 쓰고 싶은 전윤호 시인의 사직서를 쓰는 아침을 졸졸 달아 나를 위로한다. 이렇게 사직서 멋지게 쓸 자신 없으면 사직하지 말고 그냥 다니라고............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먹기 싫은 심정에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같은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전윤호 「사직서를 쓰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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