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파랑 by 천선란
나의 마음 한 구석엔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는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니오.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고 무엇을 가져다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연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연재는 로봇을 좋아하는 학생이지만 기술의 혜택과는 먼 삶을 살았고, 오히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무언가를 빼앗긴 삶을 살았다. 현재 연재의 언니 은혜는 막대한 비용으로 인해 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고, 과거에는 과학 기술에 밀려 인간을 소홀하게 대했던 그 틈에 아빠를 잃었다. 아마도 자신의 현실과 이상적인 답변 사이의 괴리가 크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재의 그 마음과 호기심이 결국 콜리를 다시 깨웠고 콜리는 투데이를 안락사 직전에서 구해내 마(馬)생 제2막을 살게 해 주었다. 마음과 의지가 현실의 벽을 무너뜨렸다.
이 책은 로봇을 소재로 한 과학소설이지만 살짝 차용만 했을 뿐 철저히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소설이다. 이 작가의 소설이 재미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랑과 나의 사막’이라는’ 다른 소설도 읽어본 적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유행이 지난 오래된 로봇이고 지금으로부터 먼 어떤 미래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콜리와 같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생각과 마음을 지닌 로봇이 존재하고 그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작가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끝까지 변질되지 않는 존재로 로봇을 택했다. 더 이상 인간 안에서는 ‘순수’ 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지구에서는 동물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공간과 자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은 지구의 동식물을 죽이고 있으며 결국엔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벼랑 끝에서 작은 희망을 꿈꾼다. 아직은 어딘가에 남아있을 인간성과 순수함이 작은 기적으로 발현되길 바란다. 나는 글 속에서 작가의 순수함이 반짝하는 순간을 발견했다.
이틀 뒤이건 2주 뒤이건 간에 어차피 투데이의 결론은 정해졌다. 이 글의 처음 물음에 대답했듯, 이미 생각과 마음이 닫힌 나에겐 투데이의 안락사를 며칠 미루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결론은 바꿀 수 없다고 단정지었고 두 개의 조건에 대해 계산기부터 두드리고 있었다. 한편 연재와 은혜, 복희, 콜리는 계산하지 않았다. 현재 내 옆에 있는 투데이가 중요했고 지금 행복한 투데이만 보였다. 자신들의 결정과 행동으로 어떤 댓가를 바라지도, 미래를 함부로 점쳐보지도 않는다. 결국 그들의 순수함은 바꿀 수 없었던 결론마저도 없던 일로 바꾸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심지어 콜리는 투데이의 행복을 바라는 그 마음을 한 치의 계산이나 머뭇거림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나에 대한 수치스러움과 콜리의 선택을 존경하는 마음이 들면서 저절로 눈물이 났다. 나에겐 과연 콜리같은 순수함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던가를 애써 찾아보려 해도, 작위적으로 지어보려 해도 할 수 없었다. 마른 땅에도 순수함의 씨앗이 날아와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이 세상에도 순수함이란 씨앗이 아직 존재할까.
이 글은 티스토리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chaegdogme.tistory.com/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