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환할 수 없는 추억

by 김모음




“야, 야, 누가 그거 돈 주고 보냐?”

“그럼 그걸 돈 주고 보지, 뭘로 보냐?


나를 한심하게 보며 친구가 한 마디 더했다.


“난 이런데 돈 안 써. 이런 거에 돈 쓰기 시작하면 돈이 줄줄 세는 거라고. 돈 모아야지.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렇게 훈계조로 나무라며 선심 쓰듯 인터넷 주소를 알려준다.


“여기 가면 다 볼 수 있어.”


그곳은 마치 콘텐츠종합편성표 같았다. 존재하는 모든 OTT 플랫폼에서 현재 방영하고 있거나 과거에 방영된 콘텐츠들이 순위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콘텐츠 포스터 사진을 클릭하니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며 동영상 재생화면이 나왔다.


“와, 진짜 다 있네. 너 이거 어디서 찾았냐?”

“내가 허튼 데 돈 쓰는 거 봤냐? 의지만 있으면 다 찾아진다.”

“근데 이거 불법이잖아. 이거 걸리면 너 큰일 나. 넌 돈도 있으면서 왜 이런 거 아끼고 그러냐. 작작하자.”



27년 전, 중학생이었던 나는 당시 일본문화 개방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록 음악에 빠져있었다.


“그레이 이번 앨범 포스터 나온 거 봤어?”

“어? 나왔어? 나 못 봤는데. 어디서 봤어? CD는 언제 풀린대?”

“CD는 아직. 조만간 나오는데 정확한 날짜는 모른대.”

“그럼 이번 주말에 테크노마트 가볼래? 거긴 나왔을지도 모르잖아.”


그 시절 2호선 강변역 테크노마트는 일본 문화의 성지였다. 패션잡지부터 시작해서 TV 및 극장판 애니메이션 CD, 음악 CD, 일본 인기 캐릭터 문구류와 액세서리, 피규어가 가득한 천국이었다. 나 같은 중학생이 일단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다가 모아둔 용돈이 탈탈 털리는 그런 곳이었다. 설날에 받은 세뱃돈 중 슬쩍한 2만 원, 그리고 하굣길 컵떡볶이의 유혹을 누르며 아낀 용돈은 테크노마트 7층과 8층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대가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갓 나온 싱글앨범의 타이틀 곡을 들으며 최신 음악잡지를 보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

금지된 것에 더 열광하는 것은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다. 그 시절의 나는 하지 말라 하면 더 하고 싶어 지는 사춘기 여중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하나라도 더 갖고 싶었던 그 CD들은 누가 봐도 정품의 모습이 아니었다. CD의 쟈켓사진은 원본을 복사한 것이라 해상도가 좋지 않았고, 노래 제목이 인쇄되어 있는 페이지는 초점이 맞지 않아 글자가 흐릿했다. 어차피 국내에서 정품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기에 어린 나는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저작권이란 개념이 많이 알려진 시대도 아니었고, 그것이 창작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누군가에 의해 복사된 CD를 밤낮없이 들었던 중학생 시절을 지나 고등학생이 된 나는 직접 CD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집에 있는 컴퓨터에 CD 복사기를 탑재하면서 나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는 정점에 이르게 된다. 여고생이 된 나는 이제 일본음악 대신 팝송과 대중가요에 빠져있었다. 잠자는 시간과 학교 수업시간을 빼고 내 CD player는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듣고 싶은 음악은 많지만 고등학생의 재원은 한정적이었다. 강남역의 대형 레코드점은 음반을 사고 싶은 마음에 부채질을 했고, 그 욕구를 어떻게든 충족하고 싶었던 나는 PC통신으로 무료음원을 구해 집에서 열심히 CD를 구워댔다. CD 앞면엔 최대한 예쁜 글씨로 수록곡을 정리해서 썼다. 내가 그 음악을 만든 것도 아닌데 CD를 보자니 내가 제작자가 된 것 같아 뿌듯했고 그렇게 한 장 두 장 모으는 재미도 쏠쏠했다. 대학생이 된 후엔 CD대신 MP3가 대세가 되었고, 무료 음원 다운로드 사이트를 찾아 “이 주의 최신곡 TOP 50”을 매주 업데이트 하며 음악과 함께하는 삶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저작권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뭐든지 무료로 향유할 수 있었던 시대에서 모든 창작물에 대해 가치를 지불해야 하는 시대로 넘어갔다. 시대에 흐름에 따라 나의 인식도 당연히 창작자의 노력에 그 만한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고 굳어졌다.


한동안 불법 음반과 같이 했던 세월을 잊고 살았다. 20대 후반 결혼을 하고 남편의 물건을 보게 된 순간, 나의 유년시절이 갑자기 소환되었다. 방 한편 낮은 3단 책장 한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래된 LP판과 CD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손때가 묻어있었고 누가 봐도 소중하게 다뤘다는 걸 알 수 있는 컬렉션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어렸을 때부터 하나하나 모은 거야. 어떤 건 한정판이라 진짜 힘들게 구한 것도 있어. 내가 진짜 아끼는 거라고. 이거 구할 때 어떤 일이 있었냐면......”


그 많은 컬렉션 중에 내 것은 없었다. 나도 소싯적에 음악 좀 들었는데, CD 한 장 구하려고 테크노 마트까지 갔었는데, 최신곡은 내 CD에 다 들어있었는데... 그 많던 복사본은 지금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불법 CD라 몇 번 들으면 음원이 튀어서 들을 수 없었고, 쉽게 만든 만큼 짐이 되면 쉽게 버렸다. 잃어버려도 개의치 않았다. 또 만들면 되니까. 그러다 보니 음반 하나에 담긴 나만의 에피소드는 없었다. 있었다 한들 떠올릴 물건이 남아있지 않으니 앞으로도 떠올리지 못하고 사장될 추억만 가득할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모든 순간이 완벽할 수 없고 아름다울 수 없지만 세월이 닦아주고 색을 입혀주면 멋진 추억으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그 추억은 그때 그 동네, 옛 사진, 오래된 물건으로 소환된다. 나는 추억을 소환할 물건을 잃었다. 더 가슴 아픈 건 그에 대한 추억도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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