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제시어-지우개
어릴 적 내 필통 속에는 항상 커다란 고무 지우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지우개로 삐뚤삐뚤하게 쓴 글씨를 지우고, 잘못 푼 수학 문제도 지우면서 잘못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지우개는 친구와 연결해주는 도구이기도 하였다. 지우개를 가지고 오지 않은 친구에게 내 지우개를 잘라서 주기도 하고 친구들과‘지우개 따먹기’놀이도 하였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지우개는 항상 내 곁에 있었던 친구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아무리 깨끗이 지우려고 해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 흔적들을 보았다.
어떨 때는 흔적들을 깨끗이 지우려고 노력할수록 종이가 찢어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 삶의 실수와도 같았다. 우리는 때때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후회할 만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한 경험과 실수는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지우려고 애쓸 때마다 또 다른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내 인생에도 지우개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인생의 지우개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고등학교 시절, 나는 우리나라 최고대학을 가는 것이 목표였고 그 대학만 가면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핑크빛 인생 로드맵을 꿈꾸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내 인생 중 10대는 공부와 시험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 아주 중요한 시험에서 실수한 적이 있다. 그 시험은 대학 진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기에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으며 내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처음 그 결과를 봤을 때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던 나의 모습이 겹치면서 좌절하였고 비참했으며 방황하였다. 그때의 나는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했던 시기였기에 충격이 더욱 컸었던 거 같다. 그러나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할 동기를 얻었다. 실수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얻은 성취감은 그 어떤 것보다 값졌다. 지우개로 잘못된 답을 지우고, 새로운 답을 적어 내려가듯, 나는 내 미래를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 배움을 얻고, 그 배움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할 기회를 얻게 된다. 실수는 결코 부끄럽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경험이다.
한번은 대학 시절 남자친구와 사소한 오해로 크게 다투었던 일이 있었다.
그때는 서로가 처음으로 사귄 이성 친구였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많았으며 그것을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강요하였다. 서로 자존심을 부리며 ‘미안하다’,‘잘못했다’라는 말 대신 서로의 잘못만을 탓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면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마치 지우개로 틀린 부분을 지우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듯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다시 그려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우개가 되어 주었다.
이렇듯 다른 사람의 실수를 지적하기보다는 그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우개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지우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닳아지면서 끝내는 사라진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우리도 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남긴 작은 흔적들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낸 변화는 우리의 존재를 증명한다.
결국, 지우개는 단순한 물건을 넘어 우리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실수를 받아들이고, 흔적을 남기며, 한계를 인식하고,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지우개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완성해 나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